이효재

“여성이 취업만 하면 여성 발전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여성의 능력은 모성적인 사랑의 힘입니다. 여성학도 여성운동도 여성의 모성적 능력을 재평가하는 데까지 천착해 들어가야 합니다.”(2008년 5월 본지 인터뷰에서)

한국 여성운동과 여성학의 대모(代母)인 사회학자 이효재(96)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4일 별세했다. 1987년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단체연합을 설립해 초대 회장을 지낸 고인은, 1990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창립을 주도해 위안부 문제 해결의 주춧돌을 놓았다. 대표적인 여성 차별 제도로 지목됐던 호주제를 2005년 폐지하는 데도 구심점이 됐다.

1924년 경남 마산(현 창원)에서 태어난 이 교수는 마산에서 고아와 홀어머니를 위한 보육시설 희망원을 운영했던 부친 이약신 목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불우한 여성들을 전도사가 되게 하거나 재혼시키는 모습을 보며 ‘여성과 교육을 위해 일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1세대 여성운동가 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1992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을 당시 모습. /연합뉴스

부친이 일경에 쫓겨 일가족이 만주로 달아날 무렵, 그를 빨리 혼인시켜 집안의 부담을 덜기 위해 짝이 될 청년을 찾아 약혼 준비를 하려는 걸 보고 “미래와 꿈을 앗아가는 듯 눈앞이 캄캄해져 혼자 마산으로 돌아왔다”는 일화가 있다. 일제 경찰보다 결혼이 더 무서웠던 셈이다.

이화여대와 미국 앨라배마대를 거쳐 1957년 컬럼비아대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이화여대에 사회학과를 창설하면서 교수로 부임했다. 1963년 미국 UC버클리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훗날 “유학 도중 6·25전쟁이 나자 참 많이 울었다. 나라가 분단돼도 남쪽만이라도 민주화되면 언젠가는 남북통일에 여성들이 기여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1977년 국내 대학에 첫 여성학 강좌를 개설하는 등 한국 상황에 맞는 여성학 도입에 힘쓰면서 한국 초창기 여성운동을 이끌었다. 민주화 운동 그룹과 기독교 여성운동, 지식인과 노동자 운동을 결합한 새로운 흐름이었다. 이때 활동한 신혜수, 이미경, 장하진, 지은희, 최영희 등은 이후 국회와 정부, NGO를 이끌며 ‘이효재 사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페이스북에 게재한 추모 글. /페이스북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국선언으로 교수직에서 해임됐다 복직하기도 했다. 호주제 폐지를 비롯해 동일노동 동일임금 운동, 국회의원 비례대표제 도입, 여성 50% 할당제 등 그가 여성운동을 하면서 주장했던 제도 중 많은 것들이 결실을 거뒀다.

사회학자로서는 ‘분단사회학’을 개척해 한반도 분단의 역사가 여성과 사회 구조에 끼친 영향을 연구했다. 한국사회학회 회장과 한국가족학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은퇴 후인 1997년 경남 진해로 내려가 지역 여성들과 함께 ‘기적의 도서관’을 운영했다. 그는 “아이들 프로그램을 하니까 엄마들이 사회 의식을 갖게 되며 더 많이 변한다”며 “여성운동을 어린이 중심으로 했더라면 진작 변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4일 한 제자가 유튜브에 올린 추모 동영상 속 2015년 인터뷰에서 “내가 가부장제 문제나 여성이 처한 입장에 대해 말하면 남자들이 듣기 싫은가봐… 지금도 그래”라고 털어놨다.

문재인 대통령은 4일 페이스북에 “이효재 선생님은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이며, 민주화운동과 사회운동에도 지대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어두웠기에 더욱 별이 빛나던 시절, 큰 별 중 한 분이셨습니다”라는 추모 글을 올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부인 김정숙 여사와 2017년 10월 23일 오후 청와대 녹지원을 관람 중인 이효재 전 이화여대 명예교수를 만나 손을 잡고 인사하고 있다./뉴시스

유족으로 딸 이희경씨, 동생 이은화(전 이화여대 교수)·이효숙·이성숙씨, 올케 이부자씨 등이 있다. 여성계는 고인을 여성장으로 배웅하기로 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 장하진·지은희 전 여성부 장관, 김상희 국회 부의장,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장필화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등 80여 명이 공동장례위원장으로 참여한다. 빈소는 경남 창원 경상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6일 오전 8시, 장지는 경기 이천 에덴낙원이다. (055)214-1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