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새벽 서울 경복궁의 자선당(資善堂) 건물 근처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했어요. 다행히 순찰하던 안전 요원이 연기를 보고 소화기와 소화전을 써서 약 15분 만에 불길을 잡았다고 합니다. 참 아찔한 일이었어요. 경복궁에는 건물이 많지만, 이 중 자선당은 장차 왕위를 이을 세자와 그 부인인 세자빈이 거처하는 생활 공간이었답니다. ‘동궁(東宮)’이라고도 불렀는데요. 참으로 기구한 역사를 겪은 건물이기도 합니다.

지난달 28일 화재가 발생한 자선당 인근 쪽문을 소방 관계자들이 살펴보고 있어요.

처음엔 ‘동궁’이 없던 경복궁

사극에서 보통 왕이나 왕비가 세자를 찾을 때 “동궁을 들라 하라”는 말을 합니다. ‘동궁’이란 세자의 거처가 보통 궁전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 건물을 부르던 말인데, 나중엔 세자 본인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였습니다.

1392년 조선 왕조 개국 3년 뒤인 1395년 경복궁이 창건됐는데,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안에 동궁은 없었어요. 그래서 궁 밖에 나가 살던 세자가 부왕(父王)을 찾아 문안하려면 수시로 궁문을 들락거려야 했습니다.

조선 왕조 최초의 세자는 태조 이성계의 8남인 의안대군(이방석)이었습니다. 태조의 계비(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인 신덕왕후 강씨가 낳은 아들이었는데, 이미 장성한 이복형들을 제치고 세자가 된 것이어서 무척 불안한 상황이었죠. 급기야 1398년 이복형인 이방원(훗날의 태종)이 주도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의안대군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3대 임금 태종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은 경복궁 밖에서 머물렀는데, 품행이 바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세자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1999년 복원된 자선당의 현재 모습입니다.

자선당의 첫 번째 주인은 문종

세자가 궁 안에 거처를 마련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은 4대 임금인 세종 때부터예요. 1427년(세종 9년) 비로소 경복궁 안에 동궁을 지은 겁니다. 이것이 자선당이었어요. 자선당의 자선(資善)이란 ‘착한 성품을 쌓는다’는 뜻입니다. 자선당은 세자의 거처인 동시에, 왕이 되기 위해 학문을 닦고 수양하던 서재나 강의실을 겸한 곳이었죠.

훗날 5대 임금 문종이 세자 시절 이곳에서 머물렀습니다. 문종이 세자로 있었던 기간은 1421년(7세)부터 1450년(36세)까지 무려 29년이었어요. 세종의 마지막 7년간은 세자가 대리청정(대신 정사를 돌봄)을 했는데, 이를 사실상 ‘문종의 치세(세상을 잘 다스림)’라 보기도 해요. 능력이 뛰어났고 일 중독자였던 문종에 대해선 “즉위 후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인 세종 못지않은 성군이 됐을 것”이란 평가가 나오기도 합니다.

문종은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했고, 측우기의 발명자이기도 했어요. 측우기를 장영실이 발명했다는 얘기는 잘못 알려진 거예요. 하지만 문종의 가정사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첫째와 둘째 세자빈이 품행 문제로 잇달아 쫓겨났고, 셋째 아내(현덕왕후로 추존)는 1441년 자선당에서 아이를 낳고 나서 죽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그 가엾은 아기가 바로 훗날의 단종이었어요.

일본에서 돌아온 자선당 유구는 복원에 활용되지 못하고 경복궁 건청궁 인근에 남아있습니다. /국가유산청

일본으로 뜯겨가 호텔이 된 자선당

자선당은 1462년(세조 8년) 한 차례 자리를 옮겼고, 1543년(중종 38년) 화재로 불타는 사고를 겪었어요. 당시의 기록을 보면 좀 섬뜩합니다. “(불을 끌) 군사들은 게을러 모이지 않았고 기율도 없어 소란스럽기만 할 뿐 불을 끌 계책을 세우지 못했다.” 당시 세자(훗날의 인종)는 궁 안쪽으로 피신해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자선당은 명종(재위 1545~1567) 초에 복구됐고 1553년 넓게 중건(왕궁 등을 보수하거나 고쳐 지음)했는데, 상량문(집을 새로 짓거나 고쳤다는 내용을 담는 글)을 퇴계 이황이 썼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년) 경복궁 전체가 불타 없어졌을 때 자선당도 함께 사라졌죠. 조선 후기에 궁궐로 쓰였던 창덕궁에선 자선당 역할을 중희당이란 곳에서 맡았지만, 지금은 헐려 남아 있지 않습니다. 1866년(고종 3년) 경복궁이 270여 년 만에 중건되면서 자선당도 다시 지어졌습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 일제는 경복궁의 많은 건물을 제멋대로 헐어 내고 팔아 버렸습니다. 일본의 재벌이자 조선의 문화재를 대규모로 반출해 사설 미술관을 세웠던 오쿠라 기하치로(1837~1928)라는 일본인이 있었는데요. 1915년 오쿠라는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 건물을 지으려고 철거했던 자선당 건물을 통째로 사들인 뒤 일본으로 가져가 도쿄 오쿠라 호텔의 ‘조선관’이란 별채로 사용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죠. 그렇게라도 보존됐더라면 불행 중 다행이었을 수도 있지만,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불타 버렸다고 합니다.

1993년 김정동 목원대 교수가 일본 도쿄 오쿠라 호텔에서 자선당 유구를 발견할 당시 직접 촬영한 사진입니다. 자선당의 기단과 계단,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 있고 건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어요. /김정동 교수

80년 만에 돌아온 자선당의 자취

“아니 이건 이제 보니... 자선당의 유구(遺構)잖아!”

1993년 여름, 도쿄의 오쿠라 호텔 산책로를 유심히 살펴보던 건축공학자 김정동 목원대 교수(현 명예교수)는 몹시 놀랐습니다. ‘유구’란 ‘옛 건축물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자취’를 뜻하는 문화유산 용어입니다. 호텔 정원처럼 꾸며 놓은 ‘돌 화분’을 자세히 보니 불타버린 자선당의 기단(건축물의 터를 다듬은 뒤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과 계단,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겁니다.

김 교수의 발견 2년 뒤인 1995년에 자선당 유구는 삼성문화재단을 통해 고국으로 반환됐습니다. 109t 분량의 돌 217개가 컨테이너 여섯 개에 실려 부산항에 도착했어요. 당시는 경복궁 복원 작업이 시작된 직후였습니다. 그러나 손상이 심하다는 이유로 자선당 유구는 복원에 활용되지 못하고 을미사변 현장인 경복궁 건청궁과 녹산 사이 공간으로 옮겨졌습니다. 현재의 자선당은 1999년에 복원된 것입니다. 김정동 교수는 지금도 “그때 유구를 복원에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