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시작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사이 전쟁이 오늘로 20일째를 맞았어요. 세계 원유의 상당량이 이동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국제 유가가 급등했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각국은 에너지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이란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란은 우리와는 어떤 관계였을까요? ‘쿠쉬나메’ ‘테헤란로’ ‘양곰’이라는 세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페르시아인 닮은 신라 유물
이란은 고대에 ‘페르시아’로 불렸던 나라의 후신입니다. 역사를 보면 페르시아는 서로 다른 시기에 두 차례 등장해요. 먼저 성경에도 나오는 기원전 550~330년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넓은 영역을 지배했던 페르시아 제국이에요. 이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로 불립니다. 또 하나는 서기 224~651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요. 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거치면서 이곳 사람들이 스스로를 ‘이란인’으로 부르며 오늘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됐답니다.
2010년 이희수 한양대 교수가 이란 국립박물관에서 옛 서사시 인쇄본 하나를 입수했습니다. ‘쿠쉬나메(Kush-nameh·쿠쉬 이야기)’라는 제목의 이 서사시는 11세기에 만들어져 14세기에 전승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자 주인공인 아비틴이 유민을 이끌고 당나라로 망명했다가 다시 그 인근 ‘낙원과도 같은 곳’이라는 나라 ‘바실라’로 피신합니다. 이곳 바실라 공주 ‘프라랑’과 결혼해 낳은 아들이 훗날 이란으로 돌아가 페르시아를 핍박하던 아랍군을 물리친다는 줄거리죠.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바실라’가 신라라고 해요. 신라를 옛 페르시아 문헌에서 그렇게 표기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당시 페르시아와 신라 사이 교류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문학 작품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일부 페르시아인이 신라로 망명했을 가능성이 큰 거죠.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의 기록에 따르면 ‘많은 페르시아인이 살기 좋은 머나먼 동쪽 황금의 나라 신라로 가 정착했다’고 합니다. 통일신라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 괘릉의 무인상과 경주 용강동 출토 흙인형 등의 외모는 움푹 파인 눈, 우뚝 솟은 코를 지녀 이국적인 풍채와 용모를 보이는데, 페르시아인을 모델로 한 것이란 분석이 있습니다. 신라 향가 ‘처용가’의 주인공 처용이 페르시아 출신일 거라는 추측도 있죠.
이란 혁명 이후에도 남은 ‘서울로’
대한민국과 이란의 수교는 1962년 10월 23일 이뤄졌어요. 이때 이란은 1925년부터 지속된 팔레비 왕조의 왕국이었고, 2대 국왕인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재위 1941~1979)가 통치하고 있었죠. 그는 급진적인 근대화·산업화를 추구했으며 친미·친서구 성향을 보였습니다. 당시 한국과 이란은 종교나 문화 등이 달랐지만, ‘빠른 산업화의 길을 걸으려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 근로자들이 대거 중동으로 진출했는데, 이란에도 2만명 넘는 한국 근로자가 코람샤 항만 공사장 등에서 일했어요. 신라 때는 이란에서 한반도로 사람들이 이동했다면 이제 반대 상황이 된 거죠.
이처럼 양국 관계가 좋았던 1977년 6월,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의 골람레자 닉페이 시장이 방한합니다. 그는 구자춘 당시 서울시장과 만나 “서울과 테헤란에 서로 ‘길 이름’을 교환하자”는 데 합의했죠. 그래서 테헤란에 ‘서울로(路)’가, 서울에 ‘테헤란로’가 생겨나게 됐어요.
이후 테헤란의 서울로는 여느 도로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길로 남은 반면, 서울의 테헤란로는 대단히 유명한 길이 됐습니다. 강남 한복판 4.1㎞ 길이에 왕복 10차선인 이 도로는 양쪽으로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여러 금융사와 벤처·IT 기업이 자리 잡은 번화가가 됐죠. 그래서 지금은 ‘이 길 이름이 왜 테헤란로냐’라는 의문을 지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고 이란에는 이슬람 근본주의로 돌아간 이슬람 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이에 따라 이란의 외교 노선도 반미(反美)로 바뀌었지만 한국과 이란의 관계는 유지됐어요. 서울에 테헤란로가 생겨나게 한 닉페이 시장은 팔레비 왕조에서 건설부 장관이 됐다가 이란 혁명 이후 공개 처형됐지만, 테헤란의 서울로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장금’ 이란 시청률 90%
2007년 이란에서는 수입 TV 드라마 한 편이 엄청난 인기를 얻었습니다. 최고 시청률이 지금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치인 90%에 달했다는데요. 한마디로 환자나 여행을 간 사람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방송 시간마다 전 국민이 TV 앞에 모였다는 얘깁니다. 그것은 여성 주인공에 요리를 소재로 삼았던 한국 드라마 ‘대장금’이었어요.
어떻게 이 정도까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입니다. 당시 테헤란에 취재 갔던 한국의 한 기자는 길거리를 지날 때마다 한국인임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멈춰 서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양곰!”이라고 외쳐대는 바람에 나중엔 성가실 정도였다고 하네요. ‘양곰’은 ‘장금’의 이란식 발음입니다.
이후 2009년 이란에서 방영된 한국 드라마 ‘주몽’이 85%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이란 내 ‘한드’의 인기는 이어졌답니다. 주연을 맡았던 배우 송일국은 당시 이란을 방문해 큰 환대를 받았어요. 송일국이 광고 모델을 맡은 한국 기업은 이란에서 매출이 크게 오르기도 했어요. ‘주몽’이란 이름으로 이란인의 개명 신청이 이어지는가 하면, 한국으로 가서 ‘주몽’의 주연 여배우 한혜진과 결혼하겠다며 떼를 쓰는 청소년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해요.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사이 전쟁은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자국민을 탄압해 온 이란의 현 이슬람 공화국 정부가 향후 어떻게 될지도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란 국민 9300만명 중 한국에 대체로 우호적인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