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6대 임금 단종(재위 1452~1455)의 유배지였던 강원도 영월 청령포를 찾는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지난해 설 연휴 때 2006명이 찾았는데, 올해 설에는 1만641명이 찾아 5배 이상으로 늘어났다는 겁니다. 단종의 비극적 죽음을 소재로 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한 결과라고 해요. 영월에는 단종의 무덤인 장릉도 있습니다. 불과 3년 남짓 임금 자리에 있다가 물러나 유배지에서 죽은 단종은 과연 어떤 임금이었을까요?
적장자의 적장자, 세손·세자 거친 왕
조선 왕조에서 ‘장차 왕이 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최초의 왕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단종입니다. 세종대왕의 큰아들인 세자(임금 자리를 이을 임금의 아들·훗날의 문종)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년) 경복궁 자선당에서 태어났어요. 2대 정종과 3대 태종은 태어날 때 아버지 이성계(훗날의 태조)가 왕이 아니었고, 4대 세종은 조선 왕조 개국 이후 태어났으나 당시 아버지인 정안군(훗날의 태종)이 왕위 계승권자인 세자가 아닌 데다 본인도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5대 문종도 태어날 때 아버지인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이 세자가 아니었죠.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嫡長子·본부인이 낳은 맏아들)가 문종이었고, 세자 시절의 문종과 세자빈 권씨(훗날 현덕왕후로 추존)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가 단종이었습니다. 세종 시절 단종은 적장손인 동시에 세손(世孫·왕세자의 맏아들로 왕위 후계자로 인정받은 사람)이었어요. 원손(아직 세손으로 책봉되진 않은 세자의 맏아들), 세손, 세자 단계를 모두 거쳐 왕이 된 경우는 조선에서 단종뿐이었어요. 명분을 중시했던 조선에서 이런 군주를 몰아내려 했던 사람은 폭력적이고 무리한 정변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태어난 다음 날, 엄마는 세상을 떠나고…
이토록 완벽한 신분을 지닌 단종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가 태어난 다음 날 어머니가 그만 산후병으로 숨을 거두고 만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망은 가엾은 아기에게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린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에게 번번이 칭찬을 들을 만큼 총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448년 세손 책봉 이후 세종은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고, 세자도 과로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손의 장래를 걱정했어요. 그래서 어린 세손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신하들에게 여러 차례 남겼습니다. 북방에서 여진족을 방비하고 있던 김종서에게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돌아오란 명까지 내릴 정도였어요.
불행히도 세종의 걱정은 현실이 됐습니다. 1450년 세종이 세상을 떠나고 문종이 즉위했습니다. 문종은 세종 만년에 대리청정(세자가 왕 대신 정사를 돌봄)을 맡아 훌륭한 업무 능력을 보였고 ‘오래 살았더라면 세종 못지않은 성군으로 남았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문종이 살아 있을 때는 그의 동생이자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은 감히 야심을 드러내지 못했어요. 하지만 1452년 문종은 갑자기 건강이 악화돼 즉위 2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불행이 시작됐습니다.
대왕대비·왕대비 없이 욕심 많은 삼촌만
단종이 6대 국왕으로 즉위했을 때 그의 나이는 만 11세였습니다. 그럼 대왕대비(전전 임금의 왕비)나 왕대비(전 임금의 왕비)가 수렴청정(대왕대비·왕대비가 어린 임금을 도와 정사를 돌보던 일)을 해서 단종을 보필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불행하게도 그럴 사람이 없었습니다. 할머니인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는 세종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인 현덕왕후는 자신을 낳고 곧바로 숨졌으니까요.
‘고아를 지키라’는 문종의 고명(임금이 유언으로 나라의 뒷일을 부탁하는 일)을 받은 대신이 우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에 뜻을 둔 수양대군의 갑작스러운 정변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병력을 움직여 경복궁을 점령하는 동시에 김종서·황보인 등 100여 명을 살해했습니다. 수양대군의 친동생이자 권력의 경쟁자로 여기던 안평대군은 유배 보낸 뒤 죽였습니다.
역사에선 이 정변을 계유정난이라 부릅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명백한 쿠데타였습니다. 계유정난은 최소한의 명분조차 없었는데, 수양대군 측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을 옹립(임금으로 모심)하려는 역모를 계획했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렸습니다.
이후 수양대군의 부하들은 지속적으로 단종에게 ‘숙부에게 양위(임금의 자리를 물려줌)하라’고 압박을 가했습니다. 마침내 1455년 3월,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며 수양대군이 7대 임금 세조가 됐습니다. 단종은 사실상 쫓겨난 것이었습니다.
영월에서 16세로 생을 마감하다
1456년(세조 2년) 성삼문·박팽년 등이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발각된 뒤 모두 처형된 ‘사육신 사건’이 일어났고, 이듬해 단종은 이 일을 빌미로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됐습니다.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뒤쪽은 험준한 산지여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와는 달리 밖으로 나오는 것이 불가능한 곳이었습니다.
유배 넉 달 만에 단종은 만 16세 나이로 숨졌는데요. 기록을 종합해 보면 임금이 내린 사약을 거부하다 살해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종의 시신은 고을 아전인 엄흥도가 몰래 거둬 안장했고, 그는 평생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세월이 오래 흐른 뒤인 1698년(숙종 24년), 조선 왕조는 ‘노산군’을 ‘단종’으로 바로잡았습니다. 죽은 뒤에 왕위를 되찾은 셈이었죠. 사육신과 김종서·황보인 등의 관직도 영조 때까지 모두 복구됐습니다. 엄흥도에겐 순조 때 공조판서 벼슬이 내려졌습니다. 단종을 보필한 사람들은 조선 왕조 때 이미 충의지사(忠義之士·충성스럽고 절의가 곧은 선비)라는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충(忠)’과 ‘의(義)’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데 훌륭한 본보기가 됐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