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흥인지문(동대문) 근처에 있는 한양도성박물관에서 오는 3월 8일까지 ‘한양도성 훼철(毁撤), 한양의 경계를 허물다’ 특별전을 열고 있어요. ‘훼철’이란 헐어서 치워 버린다는 뜻입니다. 일제의 침탈과 근대화 과정에서 허물어진 한양도성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도성의 역사적 가치와 보존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도록 기획한 전시입니다.

최근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나와 외국인에게도 알려진 한양도성은 훼손되지 않은 흥인지문 북쪽의 낙산 구간 안에 있어요. 한양도성의 나머지 여러 곳은 언제 어떻게 훼손됐던 걸까요?

서울 동대문구 흥인지문공원입니다. 한양도성 낙산 구간의 성벽이 남아 있어요.

4대문·4소문 갖춘 18.6㎞ 한양도성

1392년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6년 ‘한양도성’, 즉 수도인 한양(지금의 서울 한강 북쪽 4대문 안) 성곽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근대 이전에 성은 외부 침입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는 동시에 도시의 경계를 물리적으로 구분 짓는 역할을 했습니다. 임금의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물이기도 했죠.

이렇게 건설된 한양도성의 길이는 약 18.6㎞였어요. 4대문은 동대문인 흥인지문, 서대문인 돈의문, 남대문인 숭례문, 북대문인 숙청문(숙정문)이었고, 4소문은 동소문인 흥화문(혜화문), 서소문인 소덕문(소의문), 남소문 역할을 한 광희문(수구문), 북소문인 창의문(자하문)이었죠. 한양도성 출입은 엄격하게 관리됐고, 백성들은 성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각에 따라 일상생활을 했습니다.

사라진 숭례문·오간수문 성벽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대한제국 내정 간섭으로 1907년 대한제국 내각령 1호에 따라 ‘성벽처리위원회’가 설치돼 한양도성을 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대화와 도시 정비를 명분으로 성문과 성벽을 파괴한 것인데, 겉으로는 대한제국의 위원회로 보였지만 위원장은 일본인 기노우치 주시로였습니다. 이후 펼쳐졌던 일제의 식민 통치를 원활하게 하려는 획책이었다고 볼 수 있죠.

가장 먼저 허물기 시작한 곳은 숭례문의 두 팔과 같은 양쪽 성벽이었습니다. 성벽처리위원회는 이곳에 도로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1908년 3월 성벽 철거에 들어갔습니다. 다음은 흥인지문 근처의 오간수문이었어요. 반원형 수문 다섯 개가 있던 이곳은 물길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통로였습니다. 그런데 1907년 하천 흐름을 원활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철거됐고, 이듬해 성벽처리위원회가 남아 있던 오간수문 성벽마저 철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04년 숭례문 근처를 촬영한 사진이에요. 근처에 성벽이 보입니다. 성벽처리위원회는 1908년 이 성벽을 허물었어요.
돈의문의 성문을 전차가 지나다녀요. 돈의문은 1915년 철거됐어요.

총독부가 철거한 서대문·서소문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의 통치를 위해 들어선 조선총독부는 식민 통치를 위한 도시 계획을 본격적으로 설계했습니다. 1912년 11월 총독부는 한양도성 내부 주요 도로를 정비하는 도시계획 사업을 시작했어요. 한양의 전통적 공간 체계를 무너뜨리고 식민지 도시로 개조하려는 거였죠. 도로와 전차 노선이 확장됐고, 이를 위해 주요 교통로에 있던 성문과 성벽은 철거됐습니다.

한양도성의 동쪽 흥인지문을 드나드는 교통량이 늘어나자 1911년 흥인지문 북측 성벽이 허물어지고 도로 확장 공사가 진행됐습니다. 1914년엔 서소문인 소의문이 헐렸습니다. 소의문은 조선 시대 교통 요충지로 물자와 사람이 몰려들던 곳이었어요. 일제는 “도시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고 보전할 가치도 없다”면서 부재(성문 뼈대를 이루는 재료)를 경매로 처분한 뒤 헐어 버렸습니다.

다음 차례는 서대문인 돈의문이었습니다. 지금의 종로구 정동 사거리에 있던 돈의문은 서쪽으로 향하는 임금의 행렬이 지나갔고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도 드나들던 곳이었죠.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트램)는 1899년 개통됐는데 홍릉(지금의 동대문구 청량리)에서부터 서대문 밖까지 운행했어요. 성문으로 철길을 깔아 도성을 훼손하지 않고도 전차가 쏙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15년 돈의문 역시 도로 확장과 전차 궤도 복선화를 위해 철거가 결정됐어요. 돈의문 부재는 경매에서 205원에 팔렸다고 합니다. 1910년 쌀 한 가마(약 80㎏)가 7원이었으니까, 대략 쌀 29가마 가격에 팔린 셈이네요.

이런 식으로 한양도성 곳곳은 서서히 허물어졌습니다. 1928년 혜화문과 광희문 문루(성문 위에 지은 다락)가 철거됐고, 1938년엔 혜화문의 석축(돌담) 부분이 해체됐어요.

4대문과 4소문 등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입니다. /서울시·서울역사박물관

도성 철거 자리에 조선신궁과 경성운동장이

일제는 한양도성을 철거한 자리에 시설물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남산에 세워진 ‘조선신궁’이었죠. 이것은 당시 경성(지금의 서울)에 세워진 신사(神社) 중에서도 가장 격이 높은 것이었는데요. 신사는 일본에서 왕실의 조상이나 나라에 공로가 큰 사람 등을 신으로 모신 사당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조선인과는 무관할뿐더러 오히려 우리 입장에선 침략자를 숭배하는 경우도 생기는 종교 시설이었어요.

당시 일제는 우리나라 여러 곳에 신사를 세우고 참배를 강요해 조선인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려 했습니다. 1925년 조선신궁이 생기면서 부지와 진입로를 만들기 위해 일제는 남산 구간의 한양도성 성벽을 철거했어요. 조선신궁은 해방 이후 헐렸고 지금은 그 자리에 한양도성유적전시관과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1925년에는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의 성벽도 훼손됐답니다. 일본 왕세자의 결혼을 기념하는 동시에 ‘일본이 조선을 이렇게 근대화시켰다’고 선전하려고 ‘경성운동장’을 만들었어요. 체육 시설은 물론 군사 훈련, 황국 신민화 행사 등 식민 통치를 선전하는 공간으로 활용됐다고 합니다. 해방 이후 서울운동장이 됐으며 1984년부터는 동대문운동장으로 불렸지만 2008년 철거됐고 그 자리엔 지금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섰습니다.

물론 이런 의견도 있을 거예요. 대한제국이 멸망하지 않고 지속됐더라도 도시 개발을 위해 어차피 한양도성 일부는 철거돼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요. 일리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일제가 ‘무슨 목적으로’ ‘언제’ ‘한양도성의 어디를’ ‘어떻게’ 훼손했는지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문화유산을 아끼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고, 한국인의 의사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