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환단고기’라는 역사서 이름이 뉴스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혹시 여러분도 들어봤나요?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동북아시아 역사를 연구하는 국가 기관(동북아역사재단)의 업무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이 책에 대해 질문하면서, 관심을 끌게 됐어요.
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코너를 시작한 지 11년이 넘었지만, 환단고기 내용은 한 번도 다루지 않았습니다. 학계에서 위서(僞書), 즉 나중에 만들어 낸 가짜 역사서로 보고 있기 때문이었죠. 이를 계기로 오늘은 ‘위서’라고 의심받고 있는 대표적인 책들을 한번 정리해 봤습니다.
신라 여인 ‘미실’은 왜 교과서에 안 나올까
여러분은 ‘미실’이라는 신라 시대 여인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6~7세기 신라에서 임금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다는 인물입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고현정 배우가 미실 역을 맡았고, 김별아 작가는 소설 ‘미실’을 썼어요. 그래서 미실이 대중에게 잘 알려졌죠. 하지만 한국사 수업 시간에 미실에 대해 발표했다가는 선생님께 꾸중을 들을지도 몰라요. 미실은 역사적인 실존 인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역사서에는 물론, 1989년 이전에 쓴 어떤 문서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한문 필사본(손으로 쓴 책)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인물이죠. 화랑세기는 1989년 발견됐어요. 이 책에는 신라의 청소년 수양 단체였던 ‘화랑’에 대해 아주 상세히 적혀 있고, 충격적일 정도로 자유분방한 신라 사람들의 생활 모습도 담고 있어요. 7~8세기에 신라 학자 김대문이 화랑의 삶을 정리한 책 ‘화랑세기’를 썼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오래전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렇다면 1989년에 발견된 화랑세기가 바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일까요? 대다수 학자는 아니라고 봅니다. 박창화(1889~1962)라는 사람의 창작물이라는 것이죠. 박창화는 일본 왕실도서관 사무 직원이었고, 작가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인물 240여 명 중 신라 시대 금석문(비석 등에 새겨진 글자)에서 확인되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점, 책에서는 다른 인물로 나오는 ‘김용춘’과 ‘김용수’가 동일 인물(태종 무열왕의 아버지)로 확인됐다는 점 등이 필사본 화랑세기가 창작물이라는 근거로 여겨집니다.
‘국가’ ‘인류’… 근대 말 수두룩한 ‘환단고기’
박창화는 ‘내 책이 진짜 화랑세기’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박창화의 화랑세기를 놓고 신라 시대에 쓰인 화랑세기의 내용이 담긴 진서(眞書·진짜 책)라고 보는 학자도 일부 있고, 박창화를 가리켜 ‘이렇게 정교한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정말 천재’라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환단고기’는 의견이 갈리는 ‘화랑세기’와 달리, 학계 내에서 사실상 ‘위서’라는 결론이 난 상태예요. 내용도 허술한 데다, 환단고기를 가지고 있던 사람인 이유립(1907~1986)이 진서라고 주장했던 것이죠.
환단고기는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라는 역사서 4개를 묶은 책이라고 하는데요. 사실은 모두 이유립의 창작물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환단고기는 당혹스러울 만큼 찬란한 상고시대(가장 옛날 시대) 우리 역사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단군의 할아버지로 나오는 ‘환인’이 1만년 전쯤 ‘환국’이란 나라를 세웠는데, 영토가 아시아 대륙 대부분을 차지했다는 겁니다. 환국 안에 있던 12개 집단 중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라는 수메르 문명이 있었으니, 우리 민족이 세계 문명의 뿌리가 됐다는 얘기죠. 환국은 3301년 동안, 뒤를 이은 배달국은 1565년 동안, 그다음 나라인 조선은 2096년 동안 이어졌다고도 적혀 있답니다. 이거 절대 외우지 마세요.
이 내용이 진짜라면 세계 문명사를 송두리째 다시 써야 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우선 1979년 이유립이 공개하기 전까지 환단고기라는 책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옛날 책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얘깁니다. ‘국가’ ‘인류’ ‘전 세계’ ‘세계만방’ ‘남녀평권(남녀의 평등한 권리)’ 같은 말이 책에 나오는데, 이 말들은 19세기 이후 근대에 일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한자어입니다. 환단고기가 정말 옛날에 쓰인 책이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단어들이죠. 더구나 환국이나 배달국이 존재했다는 기원전 10~6세기는 신석기 시대로, 국가가 출현할 수 없는 단계였습니다.
하지만 환단고기의 영향력은 작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축구 응원단 붉은악마의 상징으로 쓰인 ‘치우’를 아시나요? 치우는 원래 중국 신화의 인물인데, 환단고기에서 ‘배달국의 14대 임금’으로 등장한 뒤 한국의 역사 인물인 것처럼 둔갑했습니다.
순한 맛 ‘규원사화’ 매운 맛 ‘단기고사’
환단고기처럼 상고시대 역사를 서술한 책으로 ‘규원사화’와 ‘단기고사’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규원사화는 환단고기의 순한 맛 버전, 단기고사는 매운 맛 버전이라 할 수 있죠.
규원사화는 단군조선 임금 명단과 다스린 내용을 적은 책인데, 진서로 보는 쪽과 위서로 보는 쪽이 맞서고 있습니다. 조선 숙종 때 쓴 진서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진서라 해도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대체로 규원사화를 사실을 기록한 사료라기보다는 조선 후기 민족주의가 반영된 책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를 실제보다 대단하고 오래된 것으로 그리고 싶었던 생각이 담겼다는 것이죠.
단기고사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이 썼다는 책입니다. 대야발은 실존 인물이지만 이 책을 정말 그가 썼는지는 알 수 없어요. 한문으로 쓴 원본은 없고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쓴 책만 남아 있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입을 다물기 어려워집니다. 고조선 때 ‘만국박람회(엑스포)’를 열었는데, 자행륜차(자동차), 어풍승천기(비행기), 흡기잠수선(잠수함) 같은 발명품이 상을 받았다는 겁니다. 지구가 태양계의 한 행성이라는 말도 나오고 칸트 철학 이론도 등장하는데, 모두 고조선 때로 쓰여 있습니다. 역사서라기보다는 공상과학(SF) 소설이나 유머집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