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일하다 보면 저마다 다양한 이유로 팻말 들고 1인 시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스쳐 지나가지만, 그들은 거리로 나선다. 사회부 기자 시절 각종 집회를 숱하게 취재했지만,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개인의 억울함 때문에 시위에 나선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 번도 다룬 적이 없었다. 무슨 억울함이 그리 크기에 고생인 줄 알면서도 거리로 나서는지 사연들이 궁금했다.
◇영하 10도 강추위에도 억울함에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
지난달 17일 취재에 나섰는데,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최저 기온은 영하 10도였고, 칼바람이 매서워 체감온도는 그보다 훨씬 떨어지는 날이었다. 광화문 일대를 한참 둘러봤지만, 평소에는 그렇게 많이 보이던 시위하는 사람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시위의 성지로 꼽히는 청와대 앞으로 가보기로 했다. 날씨 때문인지 시위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내 인생을 돌려 달라”는 팻말을 들고 청와대를 바라보고 서 있는 한 중년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코로나 때문에 집도 잃고 직장도 잃었다면서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비닐을 덮어쓰고 광장 한가운데 앉아 있는 할머니도 있었다. 자신이 사기를 당한 사건을 정부가 제대로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걸고 있는데, 경찰 한 명이 다가왔다. 내가 생각해도 수상해 보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와대 경비 경력만 8년쯤 됐다는 그 경찰은 “여기서 뭐하시느냐”고 물었다. 개인 사연으로 시위하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딱 맞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줬다. 그 경찰은 친절하게도 “이 동네에서 시위 좀 한다고 명함 내밀려면 2년은 넘어야 한다. 마침 4년째 청와대 앞을 지키는 할머니가 있다”고 알려줬다. 청와대까지 소문난 ‘성실한 시위자'를 꼭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올 때까지 기다려봤다.
◇평생 일군 재산 날리자 오기만 남았다
뜻하지 않게 밖에서 ‘시위 체험’을 하게 됐는데,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몸이 덜덜 떨리고 감기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어떻게 겨울에도 매일 나와서 이 추위를 견디는지 신기할 노릇이었다. 3시간쯤 지나서야 경찰이 알려줬던 할머니가 나타났다. 왠지 모를 반가운 마음에 대뜸 달려가 말을 걸었다.
김시위(73·가명)씨는 2016년 11월부터 6년째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이대역, 마포구청 앞 등을 다니며 시위하다가,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억울한 사람들은 광화문 대신 청와대 앞으로 와서 이야기해 달라”는 발표를 듣고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비가 오나, 바람이 오나 매일 같은 자리를 지킨다고 했다. 밤에는 플래카드 따위로 바람막이를 만들어 잠을 잔다고 했다. 말하는 눈빛에서부터 보통 집념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김씨가 노숙을 시작한 사연은 이랬다. 6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서울 마포구 이대역 2분 거리에 30평쯤(100㎡) 되는 4층짜리 건물 소유주였다. 김씨는 “그 건물이 평생 시장통에서 장사하면서 일군 전 재산”이라고 했다. 하지만 2016년 마포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이 건물을 날려 먹었다고 했다. 재개발에 반대해 조합에 들어가지 않았더니, 끝내 강제 집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당시 건물 시세가 15억원 정도였는데 보상으로 받은 돈은 5억원도 채 안 됐다”며 “세입자 6가구가 있었는데, 전세금을 돌려주고 나니 수중에 남는 돈이 한 푼도 없더라”고 했다.
김씨가 들이민 서류 한 뭉텅이 가운데 파묻혀 있던 건물, 토지 등기부에서 주소지와 김씨의 인적사항, 수용 당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씨가 재개발에 반대하면서 조합과 관계가 틀어져 다시 조합에 들어갈 수 없었고, 갈등이 길어지는 사이 부동산 가격도 크게 오르면서 김씨가 기대했던 수준의 보상을 받을 수 없게 된 상황으로 보였다.
해당 부지에는 현재 S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는데, 김씨가 수용 당한 면적 정도인 34평형(공급면적 약 113㎡) 시세가 18억원 정도였다. 김씨 입장에선 속이 뒤집힐 만도 했다. 김씨는 “평생 힘들게 모은 전 재산이 제대로 된 보상도 없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 내가 어떻게,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라고 했다.
초반에는 김씨와 비슷한 이유로 강제집행 당한 300여명이 제대로 된 보상을 주장하며 공동 전선을 폈다. 이들은 마포구청, 서울시, 재개발 조합 등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일이다” 같은 반응만 돌아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이 포기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김씨만은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남았다. 그는 소송전도 불사했다. 하지만 1년 여 소송 끝에 추가로 받은 보상은 75만원이 전부라고 했다. 김씨는 “남들한테 물어보면 평당 75만원씩 받았냐고 되묻는다. 다 합친 돈이 겨우 그만큼이다”고 했다.
◇“이 목숨 던져서라도 원통함 풀고 싶다”
김씨가 보상 받을 길이 있기는 한 걸까. 마포구청 담당과에 문의해 봤는데, 김씨는 이미 구청에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구청 담당자는 “이미 현금청산을 완료한 상황이라 법적으로 별도 보상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김씨에게만 특별히 보상하기엔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안타까운 마음에 조합과 중재를 여러 차례 시도하기도 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 싸움을 이어가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여러 차례 물었더니, 김씨는 조심스레 “나도 믿는 구석이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재개발 당시 강제 집행을 당했던 청년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자 조합에서 그 부모에게 보상으로 집을 한 채 제공했다는 것이다. “나도 여기서 죽어버리면 그래도 집 한 채라도 나오지 않겠어요. 지금도 매일 어떻게 목숨을 끊을지 고민해요. 여기서 할복을 할까, 사람 많은 순복음교회 앞에 가서 죽어버릴까···, 어차피 이 세상에 미련은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목숨을 내던지려 하다니. 6년 동안 굳어진 결심을 한순간에 바꿀 순 없겠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김씨에게 “그래도 살다 보면 행복한 일도 있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자 김씨는 “행복은 가족이 함께 사는 거죠. 굶어도 같이 굶고, 맛있는 걸 먹어도 같이 먹는 게 행복”이라고 말했다. 너무나 상식적인 대답인데도, 김씨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조금은 의외였다.
◇“행복이 뭔 줄 알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김씨는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게 있다면 바로 자녀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자녀들에게는 김씨가 청와대 앞에서 이러는 걸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김씨에게 “가족과 함께 하는 게 행복인 걸 안다면, 지금이라도 자녀들에게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김씨는 “자녀들도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재산을 물려주긴커녕 부담만 떠안길 순 없다”고 했다. 김씨는 “자식들한테 물려줄 집 한 채라도 받아내기 전엔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녀들 얘기는 자세히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김씨의 아픈 부분인 것 같았다.
김씨와 1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는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저 강한 집착이 김씨를 지배하면서 평범한 삶을 내려놓게 하는 듯했다. 재개발 사업으로 만족할 만한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이 어디 김씨뿐이랴. 하물며 김씨보다 더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짧은 대화만으로는 그 마음을 전부 헤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고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다른 1인 시위자들도 저마다 이유는 다르겠지만, 거리로 나서는 마음이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 김씨의 모습은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과 맞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집착을 내려놓고 지금이라도 가족에게 돌아간다면, 남은 삶동안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 무게감은 다를 지 몰라도, 비슷한 이유로 뻔한 행복을 놓치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행복의 본말이 뒤바뀌어, 아등바등 노력할수록 행복과 멀어지는 경우 말이다. 잘살아보려고 회사에 다니면서 직장 생활 때문에 매일 고통받는 사람, 가족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면서 일 때문에 가족을 후순위로 미루는 사람, 자녀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교육에 열을 올린다면서 정작 자녀를 괴롭게 하는 사람. 자녀들에게 남길 재산을 되찾아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정작 가족곁을 떠나 청와대 앞만 지키는 김씨의 모습이, 그런 모습의 극단적인 형태인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