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원 스테이시 박 밀번의 삶을 기리는 차원에서 최근 새단장해 재개점한 워싱턴DC 웰스파고은행. /웰스파고 페이스북

미국을 대표하는 대형 은행 중 하나인 웰스파고의 워싱턴 DC 조지타운 지점은 붉은 벽돌 외벽에 아치형 창문이 나 있어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 지난 11월 25일 이곳이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을 한 뒤 재개장했다. 은행들이 고객 수요에 맞춰 점포를 재단장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지만, 이곳의 리모델링이 눈에 띄는 것은 ‘확 낮춘 문턱’ 때문이다. 대출 문턱을 낮췄다는 추상적 의미가 아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사실상 배리어 프리(무장애) 수준으로 점포를 확 바꿨다. 우선 휠체어 이용자들이 금융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창구 문턱을 정말로 낮췄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안내판도 설치됐다. 청각장애인이 은행 직원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노트북 형태의 장비인 ASL(American Sign Language) 장비도 설치됐다.

미 연방 조폐국이 13일 홈페이지 화면에 걸어놓은 스테이시 박 밀번 기념 쿼터. /미 연방 조폐국

웰스파고는 조지타운 지점을 시작으로 워싱턴 DC 내 40개 지점을 모두 이런 방식으로 리모델링하기로 했다. 모바일 금융이 대세가 되면서 오프라인 지점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최근의 흐름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역주행이다. 이 은행이 이렇게 장애인 친화적 정책을 도입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준 주역 중에는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된 옛 직원도 있다. 한국계 인물로는 처음으로 미국 화폐(25센트·쿼터 달러)에 얼굴이 새겨진 장애인 인권 운동가 스테이시 박 밀번(1987~2020)이다. 이날 진행된 재개점 행사는 사실상 밀번을 위한 헌정식이었다. 우선 은행을 찾은 고객들에게 25센트 동전을 밀번의 얼굴이 새겨진 새로운 동전으로 바꿔주는 행사를 진행했다.

/웰스파고 페이스북 지난 11월 25일 미국 워싱턴 DC 웰스파고 조지타운 지점 재개점식.

지난 8월부터 발행된 따끈따끈한 신상 동전으로 앞면에는 미국의 건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 뒷면에는 휠체어를 탄 채 격정적으로 연설하는 밀번의 생전 모습이 새겨져 있다. 웰스파고는 고객들에게 이 동전을 바꿔주기 위해 1200만개 물량(액면가 300만달러)을 확보했다. 이 동전은 20~21세기 미국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한 여성 20명을 선정해 미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는 동전인 쿼터의 인물로 등장시키는 미 연방 조폐국의 ‘아메리칸 위민 쿼터스 프로그램’의 19번째 시리즈다. 밀번은 1987년 서울 용산 주한 미군 기지 121 병원에서 미군으로 복무하던 아버지 조엘 밀번씨와 한국인 어머니 진 밀번씨 슬하 3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근육 퇴행성 질환을 앓았다. 미국에서 성장하면서 초등학교 4학년 때 낙상 사고를 계기로 자신의 몸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점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웰스파고 지점 재개장식에 참석한 조엘 밀번(오른쪽) /웰스파고 페이스북

이후 청소년 시절 사회 곳곳에서 겪는 불편함과 부당함, 그리고 사회가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등 생각을 담은 진솔한 개인 블로그 글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인권 운동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스무 살이던 2007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정부가 공립 고교 교육과정에 장애인 역사를 포함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메서디스트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세 살에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이후 자신보다 형편이 좋지 않은 유색 인종·저소득층·노숙자들을 위한 권리 증진 운동에 뛰어들었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밀번을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대통령위원회 위원으로 지명했다. 그는 이 때 웰스파고와 인연을 맺었다. 2014년부터 6년 동안 웰스파고 은행에서 장애인에게 차별적이지 않은 직장 환경 조성을 전담하는 조직인 어코모데이션 매니지먼트 팀의 일원으로 채용돼 장애인 권익 증진 관련 업무를 전담했다. 이 때 코로나가 미국과 전세계를 덮쳤다.

웰스파고 은행 워싱턴 DC 조지타운 지점에 설치된 장애인 편의 장비. /웰스파고 페이스북

그런 상황에서도 노인층, 장애인, 노숙자들에게 마스크와 긴급 의약품·위생용품을 전달하는 긴급대응팀을 꾸리는 등 이들을 돌보는데 앞장서다 건강이 악화됐고 2020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이날은 그의 33번째 생일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 그는 시인 마야 안젤루, 우주비행사 샐리 라이드, 퍼스트레이디 엘리노어 루스벨트 등 쟁쟁한 인사들과 함께 ‘아메리칸 위민 쿼터스 프로그램’ 헌정자에 포함됐다. 그러자 그의 ‘직장’이었던 웰스파고도 기념 사업에 팔을 걷어붙였다. 우선 장애인 학생들을 위해 설립돼 지급해온 장학금을 ‘웰스 파고 스테이시 밀번 장학금’으로 명명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장애 여부에 관계없이 누구나 편하게 은행 일을 볼 수 있도록 순차적으로 점포 리모델링에 나선 것이다.

웰스파고 은행 워싱턴 DC 조지타운 지점에 비치된 헌정 안내문. /웰스파고 페이스북

그 1호 점포인 워싱턴 DC 조지타운 지점 재개점식에는 밀번의 아버지 조엘 밀번이 주빈으로 참석했다. 어머니 진씨는 은행에서 일하던 딸의 모습이 생생하다고 했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어요. 몸이 불편하거나 힘든 직원들의 사정을 듣고, 변호사들과도 상의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이럴 바엔 차라리 경영대학원 대신 로스쿨에 진학할 걸 그랬다’며 농담도 했죠.(웃음)” 그러면서 “웰스 파고 동료들이 여전히 스테이시를 열정적이면서 책임감이 남달랐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새로 바뀐 은행에서는 어르신이나 장애인 등이 더욱 편안하게 업무를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딸이 바라던 세상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합니다.”

지난달 한인권익향상과 정체성확립에 기여한 공로로 스테이시 박 밀번에게 사후 수여된 재외동포청장 상장. /진 밀번 제공

웰스파고 은행의 소피아 다다스 지점 전략 및 성장 시장 부문장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도 휠체어 이용자로서도 처음으로 화폐의 인물이 된 스테이시가 보여준 놀라운 강인함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은행 창구에서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스테이시의 사진, 그리고 그가 25센트 동전에 나오게 된 경위와 함께 그의 생전 발언이 고객들과 만난다. “장애인은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름답다.” 한편 밀번은 지난달 한인2세의 권익보호와 정체성 확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재외동포청에서 상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