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0일 경기 연천군 임진강 일대 석은소 훈련장에서 열린 한미 연합 제병협동 도하훈련을 마친 장병들이 연합부교를 건너고 있다. /조선일보 DB

미국 국방부가 주한 미군 수천 명을 한국에서 철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여러 당국자를 인용해 22일 보도했다. 한국 주둔 미군 약 2만8500명 가운데 “4500명을 미국령 괌 등 인도·태평양 내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구상을 검토하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협상 테이블에 北 앉히려는 美, 주한미군 감축을 ‘미끼’로 쓸 수도

WSJ는 주한 미군 일부 철수 구상이 “대북 정책과 관련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검토할 예정인 주한 미군 운영 방안의 하나”라고 전했다. 한 관계자는 “아직 이 제안이 트럼프의 책상에 올라가진 않았다”고 했다. 미 국방 예산·사업에 대한 제안을 담은 국방수권법안(NDAA)을 보면 ‘한국에 미군 병력 약 2만8500명을 유지한다’고 명시돼 있다. 미 의회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재선됐지만 취임하기 전인 지난해 12월에 주한 미군을 지금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못 박은 NDAA를 통과시켰다. 다만 주한 미군 규모 유지의 강제성이 없어 트럼프 의지에 따라 감축·철수가 가능하다.

그래픽=김성규

한국 국방부는 이와 관련해 “한미 간에 논의한 바는 전혀 없다”고 했다. 미 국방부는 언론 질의에 “미국은 철통같은 한미 동맹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차기 정부 당국자들과 협력하기를 기대하고 있다”며 “국방부가 주한 미군을 감축한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WSJ는 미 당국자들을 인용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이 더 구체화되기 전까진 (변수가 많아) 주한 미군 병력 수준을 결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트럼프가 주한 미군 철수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미군에 대한 안보 의존도가 높은 한국·일본·필리핀 등 인도·태평양 국가들이 불안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이 격화하고 양안(중국과 대만) 무력 충돌 가능성이 거론되는 가운데 미 정부는 주한 미군의 역할을 ‘북한 억지’에서 ‘중국 견제’로 바꾸고 이에 맞춰 일부를 재배치할 수 있다고 여러 차례 시사해 왔다. 트럼프는 1기(2017~2021년) 때도 주한 미군을 감축하겠다고 했지만 참모들이 반대해 실제 철수는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 3월 경기도 동두천 주한 미군 기지에서 미군의 스트라이커 장갑차가 한미연합연습 '자유의 방패'(FS·Freedom Shield) 훈련을 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22일 트럼프가 주한 미군 수천 명을 감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WSJ가 보도하면서 주한 미군 감축 여부가 한미 관계를 흔들 중대한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북·러 군사 협력 강화와 함께 심화하는 시기에 주한 미군을 감축할 경우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트럼프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한국을 여러 차례 ‘부자 나라’라 표현하며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방어하느냐”고 했다. 또 “한국이 우리를 제대로 대우하길 원한다”고 말해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인상하지 않으면 주한 미군을 감축하거나 철수할 수 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트럼프 정부는 중국 견제, 특히 중국의 대만 공격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것을 인도·태평양 군비 태세 조정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지난 3월 ‘본토 방어와 중국의 대만 침공 억제를 최우선으로 하고, 북한 등 다른 위협은 그 지역 동맹과 우방에 최대한 맡긴다’는 내용의 임시 전략 지침을 마련해 국방부 내부에 배포했다고 알려졌다. 이 지침은 “기정사실화된 중국의 대만 점령 시도를 저지하는 동시에 미국 본토를 방어하는 것”을 미 국방부의 ‘단 한 전략 계획’이라고 명시하고 있다고 당시 워싱턴포스트는 보도했다.

주한 미군 재배치 후보지로 언급된 괌은 중국에 대한 억지력을 강화하겠다는 미 국방부의 새 지침과 방향이 일치한다. WSJ는 “괌은 미군이 예상하는 ‘핫 스폿(군사 충돌 가능성이 큰 지역, 여기서는 대만해협을 뜻함)’과 가까우면서도 중국이 접근하기는 쉽지 않은 위치에 있어 미 국방부의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앞서 헤그세스는 지난 3월 아시아를 처음 순방하면서 “나는 (아시아의) 동맹국과 중국을 저지할 전례 없는 전력 재배치를 단행하려 한다”고 했다.

주한 미군 감축은 현재 국방부가 마련 중인 새 국방 전략(NDS)과 함께 다뤄질 전망이다. NDS 수립을 이끄는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정책 담당 차관은 미국이 한국에 ‘핵우산’을 계속 제공하되 북한의 재래식 위협을 방어하는 부담은 한국이 더 지는 게 옳다고 주장해 온 인물이다. 지난해 차관 지명 전 “난 한국에서 병력을 철수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는다”면서도 “주한 미군을 중국에 집중하도록 재편하며 한국이 북한을 상대로 한 재래식 방어 부담을 더 지는 방법을 지지한다”고 했다. 일각에선 트럼프가 북한 김정은을 북핵 관련 협상 테이블로 불러오기 위한 ‘미끼’로 주한 미군 감축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다만 한반도를 관할하는 인도·태평양사령부의 새뮤얼 퍼파로 사령관,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 등은 미군 감축에 따른 한국의 안보 공백을 경고하며 부정적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브런슨은 지난달 10일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감축은 문제가 될 것”이라고 했고, 퍼파로도 “그(김정은)가 침공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했다. 무엇보다 북한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병사를 파병해 현대전의 전술을 습득하고 러시아에서 무기 기술을 지원받는 가운데 주한 미군 규모가 축소될 경우 북한의 도발에 기민하게 대처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의 새 정부 출범 직전 주한 미군 감축론이 불거짐으로써, 차기 정부는 ‘관세 전쟁’에 따른 무역 협상과 주한 미군 감축 및 이와 연계될 가능성이 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을 동시에 진행해야 할 가능성이 커졌다. 트럼프는 관세 협상을 주한 미군 및 방위비 분담금과 연동하는 이른바 ‘원스톱 쇼핑’을 선호한다고 밝혀 왔다. 트럼프는 지난달 8일 한덕수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와 통화한 뒤 “우리가 한국에 제공하는 대규모 군사적 보호에 대한 비용 지불을 논의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