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16일(현지 시각) “국익 없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바이든 독트린’을 발표하며 백악관 연설 대부분을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수 결정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데 할애했다. 그러나 연설 이후 오히려 국내외적으로 모두 역풍이 불 조짐이 보이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16일 백악관에서 아프간 미군 철군과 관련한 대국민 연설을 한 뒤 캠프 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으로 떠나기 위해 인근 레슬리 맥네어 기지에서 전용헬기로 걸어가고 있다/ AP연합뉴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수 과정이 “힘들고 엉망이었다(messy)”고 말하며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고 했다. 이슬람 무장 조직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에 대해서도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일어났다”고 정보 실패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 외의 연설 내용 대부분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서 미군 철수 시한을 물려받은 상태였고, 미군 철수가 불가피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지도자들은 포기하고 국외로 달아났다”며 “아프간 정부군 스스로 싸우려고 하지 않는 전쟁에서 미군이 싸우면서 죽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CNN의 제이크 태퍼 앵커는 “(바이든) 대통령이 ‘책임은 내게 있다’고 했지만 사실상 연설은 남 탓(finger-pointing)과 특히 아프간 사람들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비판했다.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로이터 연합뉴스

뉴욕타임스는 “바이든은 연설에서 아프간 철수가 그처럼 혼란스럽게 이뤄진 점을 언급하기보다 아프간 철수 결정을 방어하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을 썼다”고 평했다. 미군 철수 결정을 지지했던 미국인들조차 철수 과정이 혼란스러웠던 것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데 그 점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런 가운데 오바마 백악관의 글로벌 관여 담당 국장이었던 브렛 브루엔은 USA투데이 기고문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철수 과정을 제대로 계획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을 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백악관과 국무부의 요직을 캠프 출신의 참모로 채우면서 최근 정세에 밝은 현역 외교관이나 관료가 적은 것이 문제란 것이다.

올 초까지만 해도 아프간 철군을 지지했던 미국 내 여론도 돌아서고 있다. 여론조사 기관 트래펄가그룹이 14~15일 미국인 108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69%는 바이든의 아프간 철군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긍정적인 응답은 23%밖에 되지 않았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와 여론조사 회사 모닝컨설트가 13~16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49%만이 아프간 미군 철수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반대한다는 응답은 37%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6일(현지 시각) 백악관 이스트윙에서 미군의 아프간 철수 결정과 관련, 대국민 연설을 통해“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UPI 연합뉴스

폴리티코-모닝컨설트는 바이든이 아프간 미군 철수 결정을 발표한 직후인 지난 4월 16~19일에도 같은 조사를 했다. 당시에는 전체 응답자의 69%가 바이든의 결정을 지지했고 반대한다는 응답이 16%였다. 약 4개월 만에 지지는 20%포인트 줄고, 반대는 21%포인트 늘어난 것이다. 탈레반의 귀환과 아프간 난민들의 비극이 생생하게 보도되면서 많은 미국인이 생각을 바꿨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제사회에서의 후폭풍도 거세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 전역에서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져가는 가운데 바이든이 ‘핵심 파트너’로 공을 들여온 대만에서 “미국을 믿을 수 있느냐”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비행기 타야 산다" 활주로 몰려든 탈출인파 - 16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는 해외로 탈출하려고 몰려든 시민들이 활주로에 몰려들며 큰 혼란이 벌어졌다. 당시 아프간 상공을 지나던 인공위성이 이 장면을 찍었다. 탈레반이 전날 카불을 함락, 아프간 정부가 붕괴하자 시민들이 공항으로 몰려들어 인근 교통이 마비되고 공항 업무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로이터 연합뉴스

국민당 의원 출신으로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 출마했던 언론인 자오사오캉(趙少康)은 16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탈레반의 카불 공격에도 미국은 교민 철수만 도울 뿐 기존 (아프간) 정부가 탈레반에 저항하는 데 협조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집권) 민진당은 중국공산당은 대만을 칠 수 없고, (중국이) 공격하면 미국이 구하러 올 것이라고 국민을 세뇌해왔는데 이는 2300만 대만인의 생명을 미·중 양국에 맡기는 무책임한 태도”라고 했다. 대만의 중국시보는 16일 사설에서 “아프간의 비극적 정국은 대만에는 섬광탄”이라고 했다. 민진당 소속인 쑤전창(蘇貞昌) 대만 행정원장(총리 격)이 미 대사관 역할을 하는 미국재대만협회(AIT) 신임 대표를 접견한 후 “아프간 사태는 내부 정세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라고 반박해야 할 정도로 미국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다.

한편,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을 총괄했던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마트 티센은 이날 트위터에 “한국이 이런 지속적인 공격을 받는 상황이라면 미국의 도움 없이는 금세 붕괴할 것”이라며 “우리(미국) 없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동맹국은 사실상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