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각)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장면들은 고통스럽다(gut-wrenching)”면서도 “나는 (아프간 철군이란) 내 결정을 확고히 유지한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재장악 후 첫 연설에서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전쟁에서 기한 없이 머물며 싸웠던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세계(의 다른 곳)에는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핵심 이익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6일 (현지시각) 원싱턴 백악관의 이스트룸에서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AP연합뉴스

그가 이날 밝힌 ‘바이든 독트린’은 자신의 임기 중에 추진할 외교 안보 정책의 핵심을 언급한 것으로 트럼프 전 대통령과는 달리 국제사회에 개입하겠다는 뜻의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를 사실상 폐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여름휴가 중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머물다가 카불 함락 후 워싱턴DC의 백악관으로 황급히 돌아온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 철군 결정을 정당화하는 데 연설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전쟁을 끝내기로 한 나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며 “나는 우리 군이 타국의 내전에서 끝없이 싸우도록 요구할 수 없고 그러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반군 격인 탈레반 진압을 위해 미군 희생자를 내는 것은 “우리(미국)의 국익에 맞지 않는다. 미국민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프간 134명 정원 수송기에 640명 탑승 - 지난 15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이륙한 미군 C-17(글로벌마스터Ⅲ) 수송기가 탈레반 통치를 피해 해외로 달아나려는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을 태운 채 카타르로 향하고 있다. 이 수송기 정원은 134명(무장군인 기준)에 불과하지만 미군은 쫓기듯 비행기 안으로 밀고 들어온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고 640명을 태운 채 비행에 나섰다. /로이터 연합뉴스

바이든은 작년 11월 당선 확정 직후 ‘미국이 돌아왔다’는 슬로건을 내놓으며 “미국이 세계 어디에서나 글로벌 리더로서의 역사적 역할을 재확인해주기를 동맹국들이 고대하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처럼 미국의 손익만을 따지지 않고 리더 역할을 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미국의 핵심 이익’이 걸려 있지 않은 곳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이날 연설로 이 슬로건은 완전히 힘을 잃게 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는 ‘이익(interest)’란 단어만 5번 반복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더애틀랜틱’은 이날 “바이든의 아프간 관련 연설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였다”며 “미군과 미국의 이익을 아프간 사람들의 운명보다 우선시했다”고 평했다. 로이터 통신은 영국인들이 “미국이 돌아온 것이냐 등을 돌린 것이냐”를 묻고 있다고 보도했다.

검문소 설치, 언론사 수색, 밤9시 통금… 곳곳서 탈레반 공포정치

탈레반은 15일 아프간을 재장악하면서 여성의 사회 활동을 보장하고 공항과 병원 등의 정상 운영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곳곳에서 20년 전의 집권을 떠올리게 하는 공포 정치를 일삼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6일 “카불을 장악한 첫날부터 탈레반 대원들은 상점과 주택가, 정부 사무실, 언론사 등을 마구 뒤지기 시작하면서 공포감이 확산하고 있다”고 전했다. 탈레반은 카불 진입과 함께 경찰서와 우체국 등 모든 관공서를 접수하고, 시내 곳곳에 검문소를 세우고 밤 9시로 통금 시간을 정했다.

목줄 매서 끌고다니는 탈레반 - 지난 13일(현지 시각)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 제3의 도시 헤라트에서 두 남성이 목줄에 감긴 채 끌려다니고 있다. 두 남성의 얼굴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탈레반은 이들이 물건을 훔치는 죄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트위터

미국 비영리 온라인 매체 더인터셉트는 “곳곳에 세워진 검문소들은 카불 시민이 공항이나 미국 대사관으로 향할 수 없도록 동선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고 전했다. 자신들의 통치를 두려워한 피란 행렬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다는 얘기다. 시내로 몰려나온 탈레반 대원들이 주민들을 무차별 검문하는 장면도 곳곳에서 보였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행인들에게서 강압적으로 휴대전화를 제출받은 뒤 열어서 정부와 관계되는 일을 하는지, 혹은 반이슬람적인 행동을 했는지 등을 조사했다는 것이다.

탈레반은 정부·미군 협력자 등에 대한 보복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일부 대원이 외국인들을 상대로 행패를 부리는 등의 사례도 목격되고 있다.

WSJ는 카불의 호텔에 묵고 있던 아프간계 캐나다인 여성이 16일에 탈레반에게 당한 일을 소개했다. 로지나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남편과 함께 투숙 중인 호텔의 정원에 있었는데 탈레반 대원들이 몰려와 위협해서 부부가 함께 호텔 방으로 피신해 화장실에 숨었다. 탈레반 대원들은 몇 분 뒤 호텔 매니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와서 나오라고 강요했고, 지갑과 여행 가방을 뒤지고 여권을 보면서 남편과 실제 부부 사이인지 혼인 증서까지 요구했다. 참다못한 남편이 “독실한 무슬림은 남의 아내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따지자 대원들이 남편의 뺨을 후려치고 무기로 마구 때렸다고 한다. 공포에 질린 부부는 호텔을 탈출했다.

카불이 함락되기 전에도 탈레반 점령 지역에서 투항한 군인들을 살해하는 일이 잇따랐다. 여성들에게 탈레반 대원과의 결혼을 강제하거나, 주민들을 폭행하는 등 행패를 일삼았다는 목격담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지난달 하순에는 한때 미군 통역사로 일했던 주민이 명절을 쇠러 차량을 운전해 여동생을 데리러 가는 길에 탈레반 대원에게 붙잡혀 참수 살해됐다는 소식이 CNN 등 외신들을 통해 전해졌다. 탈레반은 폭력 행위를 최대한 자제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모양새를 보이지만, 잔혹한 인권 탄압과 폭정이 재개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정부·미군·외국 협력자에 대한 보복이 없을 것이라는 공언에도 불구하고 결국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로 가혹하게 통치했던 과거 탈레반과는 다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 국제 칼럼니스트는 “돌아온 탈레반은 정권 안정을 위해 해외 원조와 투자가 필요할 것이고, 파키스탄·인도·중국·러시아·이란 등 주변 열강들 사이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며 “어쩌면 그들은 백악관 직통 단축 전화키를 갖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며 온건하게 변화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탈레반 문제를 오랫동안 취재해온 파키스탄의 저널리스트 아메드 라시드는 미 NPR 방송에 “교육을 받고 온건했던 1990년대 탈레반 지도자들과 달리 현재 카불을 점령한 탈레반의 젊은 지도자들은 더욱 극단주의 성향이고, 여성들을 (함부로) 다루는 자신들의 통치 방식을 자랑스러워한다”며 탈레반 체제 아프간의 앞날을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AP통신에 따르면 탈레반은 이날 “모두에 대한 일반 사면령이 선포됐다”면서 “확실한 신뢰를 가지고 일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 관리들이 탈레반의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업무에 복귀하지 않아 혼란이 빚어질 것을 우려해 사면을 선포한 것이다.

한편 17일 아프가니스탄 TV 채널 ‘톨로뉴스’에서는 탈레반 관계자가 출연해 여성 앵커와 수m의 간격을 두고 마주 보며 앉아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전파를 타 눈길을 끌었다. 이날 탈레반 공보팀 소속 몰라위 압둘하크 헤마드는 여성 진행자인 베헤슈타 아르간드의 카불 상황과 탈레반이 진행 중인 가택 수색에 관한 질문에 답하면서 “전 세계가 탈레반이 이 나라의 진정한 통치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며 “사람들이 탈레반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놀랍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탈레반 지도부가 조심스럽게 이미지 관리에 나서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아프간 전체가 탈레반 통제로 들어가면서 보복을 두려워한 아프간군 병력의 탈주 소식도 잇따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에 따르면 지난 주말에만 우즈베키스탄으로 아프간 병력 585명과 전투기 22대, 군용 헬기 24대가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의사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부상을 입은 군인들을 수송하던 아프간 군용기가 격추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