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7월 쿠바 아바나 공항. 작은 여행가방을 든 열여섯살 소년이 부모 배웅을 받으며 혼자 비행기에 올랐고 이륙 45분 뒤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도착했다. 쿠바 난민 자격으로 혈혈단신 미국에 온 소년의 이름은 미겔 베이조스. 자수성가 끝에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그는 결혼으로 얻은 의붓아들 제프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줬고, 그 아들은 자신이 창업한 전자상거래업체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그렇게 세계 최고 갑부 집안으로 유명해진 베이조스가(家)의 큰어른 미겔 베이조스가 부인 재클린 베이조스와 함께 지난 16일(현지 시각) 자신이 졸업한 미 델라웨어주의 천주교계 고등학교인 살레지애넘 스쿨에 1200만 달러(약 135억7800만원)를 기부했다. 학교 측은 “가톨릭 학교가 지금까지 받은 단일 기부액 중 최고수준 액수”라고 했다.
이번 기부금은 살레지애넘 스쿨의 전 교장인 제임스 바인 신부 추모 기금에 보태졌다. 당장 형편이 어려운 학생 24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아버지 베이조스’의 이번 기부는 최근 아들 제프 베이조스가 불륜 파문과 이혼, 연인의 오빠와의 법적 분쟁 등으로 잇딴 구설에 오른 상황과 대비돼 더욱 주목받고 있다. 미겔 베이조스는 의붓아들 제프의 인생 멘토이자 아마존 초기 투자자로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아메리칸 드림의 모범적인 전형으로 더욱 조명받고 있다. 그가 여러 인터뷰를 통해서 자수성가한 과정을 진솔하게 털어놨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그는 쿠바 산티아고에서 사업을 하는 아버지와 가정 주부 어머니, 형제자매와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1959년 쿠바 공산 혁명으로 피델 카스트로가 집권하면서 모든게 바뀌었다.
친미 바티스타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분노했던 대다수의 쿠바인들은 처음에는 카스트로 정권에 호의적이었다. 베이조스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카스트로 정권은 선거를 없앴고, 외국기업과 국내기업들을 국영화하기 시작했으며, 학교에서는 마르크스 레닌 사상과 공산주의 이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베이조스 부친이 운영하던 제재소 등 소규모 사업체들도 한순간에 공산정권에 빼앗겼다. 쿠바의 암흑기를 예견한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미국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와 천주교계가 손잡고 공산치하 쿠바에서 우선 미성년자만이라도 신속하게 비자를 발급해 자유 세계로 탈출시키기 위해 합작한 이른바 ‘페드로 판(피터 팬의 스페인어 표현) 작전’이었다. 베이조스의 부모도 여기에 동참했다.1960~1962년 사이 1만4000여명의 쿠바 미성년자들이 미국으로 향했고, 이들은 미국에서 ‘피터 팬 난민’으로 불렸다. 마이애미 교구가 몰려드는 ‘피터팬 난민’들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미국의 다른 교구들이 나서서 아이들을 분산 수용했다.
그 중 한 곳이 델라웨어 윌밍턴 교구다. 살레지애넘 교장이던 바인 신부 등이 앞장서 위탁가정들과 난민 아이들을 결연시켰고, 아예 ‘카사 드 살레’라는 쿠바 출신 청소년 전용 기숙사를 세워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교육했다. 이렇게 델라웨어 천주교구와 지역 사회의 돌봄을 받았던 ‘피터팬 난민’ 중에는 훗날 의사, 박사, 학자, 소설가, 기업가 등이 여러 명 배출됐다고 한다. 미겔 베이조스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델라웨어에서 지낸 고교시절을 추억하며 “그 시절 나와 함께 미국에서 생활했던 피터팬 난민 중에서는 안좋은 끔찍한 경험을 한 사례도 적지 않다고 들었지만, 나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고 했다.
고교를 졸업한 그는 쿠바 난민 장학금을 주는 대학을 수소문하다가 뉴멕시코주 앨버커키대에 입학했고 기계공학과 수학,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직전 네 살 된 아들과 어렵게 살고 있던 싱글맘 재클린과 결혼을 하면서 ‘미국 베이조스 집안’이 첫걸음을 떼었다. 미겔 베이조스는 이후 굴지의 에너지 기업 엑손에 입사해 30여년간 근무하고 고위급으로 승진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가 끈기와 성실로 목표를 이뤄가는 모습은 훗날 제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미겔은 의붓아들 제프가 초창기 아마존을 창업했을 때 투자금을 보태며 격려했다. 제프 베이조스는 여러 차례 사석에서 의붓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표해왔다.
2019년 5월에는 아버지 미겔과 뉴욕 자유의 여신상을 함께 돌아보면서 포옹하고 건배하는 동영상을 올리고 “그의 기개와 결단력, 긍정주의는 언제나 영감을 준다”고 썼다. 미겔은 비록 공산치하 조국을 탈출한 난민 출신이지만 쿠바계라는 정체성과 자부심도 공개적으로 표시해왔다. 그는 2016년 스미스소니언 매거진 인터뷰에서 “아내는 스페인말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아이들은 쿠바 요리를 좋아한다”며 “미국에 온 이민자들은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하고 적응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미겔은 부인 재클린과 함께 2000년 ‘베이조스 가족 재단’을 공동 창립했으며 미국과 제3세계 국가 등의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 기회 확대를 위한 자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