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4월 19일 미 오클라호마주 오클라호마시티에 있는 연방 정부 건물에서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굉음이 들리면서 건물이 폭삭 내려앉았다. 168명이 목숨을 잃었고, 500여명이 다쳤다. 2001년 9·11전까지 미 본토에서 일어난 최악의 테러였던 오클라호마 폭발테러였다. 범인은 극단적 사상에 심취해있던 당시 스물일곱살의 전직 군인 티모시 맥베이였다. 그는 2001년 6월 유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자칫 범인을 잡지 못한 채 영구미제로 남을 뻔했다. 사건 직후 맥베이는 테러와 무관한 불법 총기 소지 혐의로 체포돼 유치장에 구금됐는데, 지역 수사관과 법원 판사는 그의 정체를 모른 채 석방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유치장에서 풀려나기 직전, 현장으로 달려온 연방 검사가 티모시의 정체를 알리고 가까스로 신병을 확보했다. 그 검사가 조 바이든 행정부 첫 법무장관으로 2월 입각한 메릭 갈런드(69)이다.

메릭 갈런드 미 법무장관이 19일 오클라호마 테러 26주기 기념식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해마다 4월 19일이 되면 오클라호마시티에서는 폭발테러로 무너진 연방 건물 터에 세워진 기념관에서 추모식이 열린다. 올해 추모식은 여느해와는 달랐다. 주임 검사였던 메릭 갈란드(69)가 법무장관이 돼 참석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의 추모사는 특별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구체적 증언과 소회, 아픔을 이겨낸 지역사회에 대한 위로와 연대의 메시지가 이어지면서 참석자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갈란드 장관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유대인 작가 엘리 위젤이 생전에 했던 “죽은 자와 산자 모두를 위해 우리는 증언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며 당시 상황을 짚었다. 그는 “26년전 나는 워싱턴 법무부 사무실에서 앉아있을 때 폭발을 전하는 1·2·3보가 연이어 들어왔다”며 “사건과 관련한 정보가 쏟아지고 수많은 수사시관 관계자들이 FBI본부에 집결했다”고 떠올렸다.

1995년 폭발물테러로 건물의 절반이 뜯겨나간 오클라호마의 연방 정부 청사. /FBI 홈페이지

갈란드 장관은 티모시 맥베이 체포 상황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증언했다. 현장 초동 수사팀은 건물 폭발 장소로부터 200야드(약 182) 떨어진 곳에서 주차된 수상한 포드 트럭을 발견했고, 차량등록번호를 추적해 캔자스주 정션시티에서 렌트됐다는 것을 확인했다. 렌터카 회사로부터 차를 빌려간 남성의 인상착의를 알아낸 뒤 몽타주를 그려 주변을 수소문한 끝에 그림 속 인물을 봤다는 호텔 주인을 찾아냈다. 이렇게 초동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워싱턴에 있던 주임 검사 갈런드는 사건 현장으로 날아갔다. 그가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더도말고 덜도말고 벽돌만했던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 수화기너머로부터 미 역사상 최초의 여성 법무장관이던 재닛 레노(2016년 별세)의 긴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의자 티모시 맥베이가 지금 노블 카운티 유치장에 있네.” 당시 맥베이는 테러 발생 90분 뒤 검문에서 불법 총기 사실이 적발돼 체포됐다. 그를 이송한 지역 수사관은 폭발테러범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갈런드가 오클라호마에 도착하자마자 카운티 법원으로 달려갔을 때, 맥베이는 막 풀려나려던 참이었다.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엇갈리면서 테러범이 수사망을 벗어날 수 있던 상황이었다.

/NPR 홈페이지 1995년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폭발테러 당시 주임 검사였던 메릭 갈런드가 언론 브리핑을 하는 모습.

용의자 신병을 확보한 갈란드는 건물 폭발 현장으로 갔다. 군경과 소방관, 구조대원들이 무너진 건물 잔해를 밤을 새서 기다시피 헤집으며 필사적으로 생존자와 시신을 수색했다. 그들 상당수는 미국 전역에서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울고 있었다. 수사팀과 구조대원들은 폭발로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어린이방 흔적 앞에서 말을 잃었다. 그리고 어린이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며 반드시 테러범을 잡아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맹세했다. 수사팀의 소속은 연방정부, 주정부 등 다양했다. ‘원팀’으로서 융합이 어려울 수도 있는 상황 이를 직감한 듯 프랭크 키팅 당시 오클라호마 주지사는 “소속기관끼리 불필요한 경쟁은 하지 말자. 함께 힘을 합쳐 놈을 찾아내자”며 단합을 독려했다.

오클라호마 테러 추모기념관으로 들어가는 문. 9시 3분이라고 새겨진 시각은 폭발테러가 일어나던 9시 2분 뒤 치유의 시간이 시작됐음을 뜻한다. /오클라호마 테러 추모기념관 홈페이지

갈런드 장관은 수사팀과 구조대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오클라호마 지역민들의 선행도 회고하면서 “가족처럼 돌봐줬다”고 했다. 힘은 들었을지언정 불편함은 없었다고 했다. 구세군이 밤낮으로 음식을 가지고 온 덕에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은 안나도 배고픔을 느낄 새가 없었다고 했다. 수사팀과 구조대의 편의를 위해 치약·탈취제·셔츠·우비 등 공장에서 갓 나온 각종 생활용품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들여와 켜켜이 쌓였다. 이발사들은 순번을 정해 사고현장으로 찾아와 무료 이발 서비스를 제공했다. 임시 세탁소도 세워졌다.

오클라호마 폭탄테러 소식을 담은 1995년 4월 21일자 조선일보 1면

갈런드 장관은 “당시 내 사진을 보면 이발을 그렇게 자주했던 것 같지는 않다”면서도 “지역민들의 마음씀씀이에 대해 어떻게 감사인사를 드려야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당시 주민들이 보여준 전례 없는 봉사와 관용, 친절은 ‘오클라호마 스탠더드’로 알려졌다”고 했다. 테러범 멕베이는 사건 발생 6년 뒤인 2001년 유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이 집행됐다. 갈런드 장관은 “여러 해가 지났지만, 멕베이 같은 이들이 우리 곁에서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며 “우리모두 단결해 맞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클라호마 시티는 언제나 내 마음에 남아있다”는 말로 추모사를 끝냈다.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폭발테러의 주범 티모시 멕베이의 몽타주(오른쪽)와 머그샷. 2001년 사형이 집행됐다. FBI 홈페이지

하버드 로스쿨에 수석입학했고, 차석졸업한 갈런드는 유명 로펌 ‘아놀드 앤 포터’에서 근무하다가 연방 검찰로 공직에 입문해 하버드 출신 천재 테러범 ‘유나바머’ 사건과 오클라호마 폭발테러 등을 수사했다. 이후 사법부로 자리를 옮겨 워싱턴 연방항소법원에서 법원장까지 올랐다. 워싱턴 연방항소법원장은 미국의 판사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로 연방 대법관을 여럿 배출한 자리다. 실제 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연방 대법관 후보로 지명됐다. 하지만, 대통령 임기 말 대법관을 지명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 공화당이 인준 절차 개시를 거부하면서 그는 293일동안 후보자로 있다가 낙마했다. 이후 지난 1월 출범한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초대 연방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으로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