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남부 테네시주 내슈빌의 또 다른 이름은 ‘뮤직 시티(음악의 도시)’다. 도시 중심가에 밀집한 수십곳의 공연장 겸 식당에선 대낮부터 라이브 음악이 쩌렁쩌렁 흘러나온다. 워너뮤직 등 초대형 음반사들과 레코드 스튜디오, 주요 음악 단체 사무실도 내슈빌에 몰려있다.

18일 내슈빌 도심에 문을 여는 미국흑인음악박믈관. /블랙엔터프라이즈닷컴

하지만 엄밀히 말해 여기서 말하는 음악은 ‘컨트리'다. 도시 전체가 연중 관광객과 음악 팬들로 넘쳐나지만, 백인이 아닌 사람들을 보기는 좀처럼 어렵다. 음악이 인종을 나누는 또다른 벽임을 보여주는 곳이 또한 내슈빌이다.

그런 이곳에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일(18일)에 맞춰 미국 흑인음악박물관(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Music)이 개관한다. 미국이 지난해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으로 촉발된 전국적인 BLM(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로 최악의 흑·백 인종갈등을 겪은 후유증이 여전한 상황에서 백인 음악의 성지(聖地)로 불리는 지역에 건립된 흑인음악박물관 개관소식이 관심을 끌고 있다.

힙합음악의 상징인 그래피티를 전시한 공간 조감도. /흑인음악박물관 홈페이지

미국 흑인음악박물관은 20여년동안 진행돼온 장기 프로젝트다. 발단은 지역 사회의 자성이었다. 내슈빌은 지미 헨드릭스, 레이 찰스, 리틀 리처드 등 미국 팝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전설적인 흑인 뮤지션들이 초창기 활동을 했던 무대다. 내슈빌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남부의 흑인 음악인들이 미국 전역으로 이주했고, 다양한 장르가 파생된만큼 내슈빌이야말로 흑인 음악의 뿌리라는 자부심을 되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다양한 인종의 관광객들의 방문을 이끌어내지 못하면서 ‘컨트리 음악을 좋아하는 백인들만의 관광지’로 인식되고 있다는 비판적 여론도 깔려있었다

힙합과 랩 음악의 역사를 알려주는 전시 공간 조감도. /흑인음악박물관 홈페이지

1998년부터 건립 논의가 시작했고, 2002년 내슈빌 상공회의소에서 흑인음악박물관의 건립을 공식 제안했다. 이후 태스크포스를 꾸리고 건립 타당성 검토에 착수하는 과정에서 이 프로젝트는 전국적인 관심을 얻게 되며 속도가 붙었다. 재정적 후원과 전시물품 건립 기증의사도 쇄도했다. 지역 단위 프로젝트는 미국 전역에서 관심을 갖는 사업으로 몸집을 불렸고, 국립 박물관 또는 국가 차원의 박물관을 뜻하는 ‘내셔널 뮤지엄(National Museum)’이 됐다.

가장 중요한 건립부지를 정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내슈빌 도심 한복판에 있던 5만6000평방피트(약 1574평) 넓이의 낡은 컨벤션 센터 부지에 대한 재개발 계획과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됐다. 수십곳의 컨트리음악 공연장과 세계최대규모 음악박물관 중의 하나인 ‘컨트리 음악 명예의 전당(Country Music Hall of Fame)’이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지척이다.

흑인음악박물관 내에 갖춰진 영상물 상연 공간. /흑인음악박물관 홈페이지

2017년 착공식을 가졌고, 3년 여 만에 개관에 이르렀다. 당초 작년 9월 미국 노동절 연휴에 맞춰 문을 열려고 했지만,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연기가 됐고 마틴 루터 킹 기념일에 맞춰 개관식을 여는 것으로 날짜가 재조정됐다. 이 때문에 “개관식이 테네시주와 킹 목사와의 오랜 악연을 끊는 상징적인 자리가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39세였던 1948년 4월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암살당한 곳이 바로 테네시주 멤피스이기 때문이다. 18일 개관식은 사회적 거리 두기 속에 주요 관계자들이 리본을 끊는다. 일반 공개는 오는 30일부터다.

소울 음악의 전설 레이 찰스 /조선일보DB

박물관에는 흑인 음악이 미 대중음악과 사회에 끼친 영향을 알 수 있는 1500여점의 전시품이 공개된다. 루이 암스트롱, 엘라 피츠제럴드, 냇 킹콜, 빌리 홀리데이, 휘트니 휴스턴부터 비욘세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팝스타들의 악기와 무대의상과 공연계약서 등 각종 소품이 전시된다. 또 노예로 고통받던 시절부터 불렀던 흑인 영가와 재즈, 소울, 리듬 앤 블루스를 거쳐 지금 힙합에 이르기까지 흑인 음악의 역사를 미국 사회의 변화상과 함께 알 수 있도록 전시 프로그램을 꾸몄다.

박물관 건립 취지에 공감한 각계 각층의 참여와 기부가 잇따랐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은 100만 달러(약 11억350만원)를 쾌척했다. 박물관의 전시·교육 프로그램 등을 담당할 학예 부문은 세계적인 음반사인 소니뮤직에서 전담한다. 소니뮤직은 이를 위한 특별 기금을 편성했다.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팝 스타 휘트니 휴스턴. /조선일보 DB

그래미상을 받은 흑인 음악인 4명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한다. 리듬 앤 블루스 가수 인디아 아리, 블루스 기타리스트 케브 모, 가스펠 가수 시시 와이넌스, 그리고 흑인으로서는 드물게 컨트리 가수로 성공한 다리우스 러커가 그 4명이다.

국립흑인음악박물관과 이웃하게 된 기존 컨트리 음악 명예의 전당은 규모와 전시품, 연구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음악박물관으로 유명하다. 지척 거리를 두고 흑·백 음악 박물관이 나란히 들어서 선의의 경쟁을 펼치게 되는 모양새가 됐다.

흑인음악박믈관의 이웃 컨트리음악 명예의전당. /내슈빌 관광청 홈페이지

박물관 측은 “기존의 음악 공간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해 ‘뮤직시티’ 내슈빌의 정체성을 더욱 굳건히 하겠다”고 말했다. 이 박물관의 비처 힉스 3세 최고경영자는 “마틴 루터 킹 기념일에 박물관 문을 열게 돼 ‘형제로서 다함께 사는 법을 배우자’던 킹 목사의 메시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