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밤(현지 시각)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공항 활주로에 나프탈리 베네트 이스라엘 총리를 태운 비행기가 내려앉았다. 트랩에서 내려온 베네트 총리는 마중 나온 압둘라 빈 자예드 알 나흐얀 UAE 외무장관과 한참 손잡고 활짝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총리가 UAE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12일(현지 시각)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공항에 도착한 나프탈리 베네트(왼쪽) 이스라엘 총리가 마중 나온 압둘라 빈 자예드 알 나흐얀 UAE 외무장관과 나란히 걷고 있다. 베네트 총리는 이날 오전 각료회의에서 UAE 방문을 전격 발표한 뒤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UAE의 주요 고위 인사들과 만나 이란 핵 합의 및 양국 간 협력 사안 등을 논의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AFP 연합뉴스

베네트 총리는 이날 오전 이스라엘 각료 회의에서 UAE 방문을 기습적으로 발표한 뒤 반나절 만에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공항 환영식 동영상을 트위터에 올리면서 ‘역사를 만들고 있다’고 썼다. 베네트 총리는 방문 이틀째인 13일 UAE의 실권자인 모하메드 빈 자예드 알 나흐얀 아부다비 왕세제와 회담했다. 나흐얀 왕세제는 “이번 총리 방문이 양국 관계를 더욱 진전시켜줄 것으로 기대하며 중동 지역의 평화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아미르 하예크 UAE 주재 이스라엘 대사는 “회담에서 이란 문제뿐 아니라 여러 현안이 논의됐다”고 이스라엘 방송에서 밝혔다.

베네트 총리의 UAE 방문은 현지 언론들도 발표 직전까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극비리에 추진됐다. 주요 외신은 그의 이번 방문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진행 중인 이란과 주요 6국(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독일)의 핵 합의(JCPOA) 복원 협상과 큰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JCPOA는 이란이 핵 개발을 중단하면 국제사회가 제재를 풀어주는 내용으로, 2015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이 주도해 타결됐다. 그러나 3년 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탈퇴, 위기에 처했다. 이란도 JCPOA에 명시된 한도를 넘어 우라늄 농축량을 늘려가며 맞불을 놓아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지난 4월부터 진행된 협상은 이란과 미국의 입장 차로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란을 자국의 최대 안보 위협으로 간주해온 이스라엘은 JCPOA 복원을 껄끄러워한다. 이스라엘은 이란이 경제제재가 풀려 자금을 확보할 경우 언제든지 은밀하게 핵 개발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면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한 레바논에 거점을 둔 친(親)이란계 무장 조직 헤즈볼라의 활동이 증대될 수도 있다. 수니파 이슬람 국가인 UAE 역시 시아파의 맹주 이란과 이슬람 종파 싸움으로 대립하고 있다. UAE와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 왕정 국가들은 혁명으로 왕정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한 이란의 부상을 체제를 흔들 수 있는 강력한 위협으로 간주해왔다.

이런 구도를 감안해 이스라엘이 UAE를 반(反)이란 연대에 끌어들이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 뉴욕타임스는 “베네트 총리의 UAE 방문 성사는 걸프 국가들이 팔레스타인 문제보다 이란의 핵 위협을 당면 과제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영국 더타임스는 “베네트 총리는 이번 방문에서 나흐얀 왕세제를 설득해 이란을 상대로 이스라엘이 군사 행동에 나설 경우 지지해줄 것을 요청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스라엘 총리가 UAE를 방문해 환대받는 장면부터 중동 정세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UAE는 그동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서 대다수 아랍 국가와 마찬가지로 종교·민족적으로 동질감이 있는 팔레스타인 편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의 주도로 체결된 ‘아브라함 협정’을 계기로 이스라엘과 국교를 수립하고 상주 대사관 상호 개설에 합의했다. 이후 이스라엘 고위층의 UAE행이 잇따랐다. 올해 6월에는 야이르 라피드 외무장관이 UAE를 찾아 이스라엘 대사관 개관식에 참석했고, 10월에는 요엘 라즈보조브 관광장관이 두바이 국제 박람회(엑스포) 이스라엘관의 개관식 테이프를 직접 잘랐다. 국교를 정상화한 지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에 두 나라가 급속히 밀착하는 양상이다.

NYT는 “올해 1~7월 이스라엘과 UAE의 교역액은 6억달러(약 7089억원)를 기록해 전년 동기 대비 12배 증가했고, UAE는 이스라엘에 100억달러(약 11조8150억원) 규모의 투자 펀드를 조성했다”며 “(아브라함 협정 체결 후) 두 나라의 교역 규모도 급증하고 있다”고 했다.

군사 분야에서도 밀착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홍해에서 미국·이스라엘·UAE·바레인 등 4국이 처음으로 합동 해상 훈련을 가졌다. ‘아브라함 협정’ 전까지 적대 관계이던 이스라엘과 UAE·바레인 군인들이 미 해군 상륙함 포틀랜드함에 함께 올라 수색·점거 훈련을 함께했다. 이란이라는 공통적 위협을 마주한 이스라엘과 걸프국들이 밀착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모습이다.

‘UAE를 방문한 첫 이스라엘 총리’로 기록된 베네트가 극우 정당 야미나당을 이끌고 있는 강경 보수파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아브라함 협정 체결의 주역인 베냐민 네타냐후 당시 총리가 베네트가 이끄는 반(反)네타냐후 연정 결성으로 올해 6월 물러나면서, 이스라엘의 외교 노선에 당장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그러나 오히려 아랍 국가들과 맺은 관계는 더욱 긴밀해지는 양상이다. 이스라엘은 지난달에는 모로코와 안보 협력 협정을 체결하는 등 아브라함 협정 후속 조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에 따라 아랍국에서 추가 수교국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아브라함 협정

2020년 9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의 중재로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인 UAE·바레인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경제·관광·교육·안보 등의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합의한 협정.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공동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이름을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