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오른쪽에서 둘째)과 이복동생 함자 왕자(가운데)의 2012년 모습./AFP 연합뉴스

3일(현지 시각) 영국 공영방송 BBC가 5분 42초짜리 동영상 하나를 전격 공개했다. 등장 인물은 중동 국가 요르단의 최고 권력자 압둘라 2세 국왕의 이복동생인 함자(41) 왕자였다. 함자 왕자는 “군 합참의장이 아침에 찾아와 집 밖에 나가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고 요구했다”며 “전화와 인터넷이 끊겼다”고 했다. 가택 연금을 당했다는 주장이었다.

함자 왕자가 이날 아침 촬영해 변호사를 통해 전달한 이 동영상을 BBC가 보도하기 직전 요르단군 사령부는 성명을 냈다. 군은 “함자 왕자 측에 요르단의 안정과 평화를 저해하는 데 이용될 수 있는 행동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며 “함자 왕자 측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했다.

아이만 사파디 요르단 부총리는 4일 기자회견에서 “함자 왕자가 외세와 결탁해 요르단의 안보를 훼손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며 “당국이 함자 왕자와 해외 세력의 통신을 도청해 요르단의 안전을 해치려는 것을 밝혀냈다”고 말했다. 일간 가디언을 비롯한 서방 매체들은 압둘라 2세 측이 함자 왕자가 쿠데타를 모의한 것으로 보는 것 같다고 보도했다.

사파디 부총리는 함자 왕자의 측근으로 재무장관과 왕실 재정 책임자를 지낸 바셈 이브라힘 아와달라 등 14~16명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요르단 국가보안법원에 회부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요르단 왕실의 함자 왕자(오른쪽)와 미국계 어머니 누르 왕비. 1999년 모습이다. /AFP 연합뉴스

요르단 정국이 긴박하게 굴러가자 미국과 유럽 언론들은 비상한 관심을 표시했다. 요르단은 남한 90% 넓이의 영토에 인구 1000만명이 사는 비교적 작은 나라지만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북쪽으로는 시리아, 서쪽으로는 이스라엘, 동쪽으로는 이라크, 남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요르단은 아랍 국가지만 친(親)서방 노선을 걸어왔고, 서방 국가들도 요르단을 중요한 동맹국으로 여기고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요르단은 IS(이슬람 국가) 퇴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5년 요르단 공군 조종사 한 명이 IS에 납치돼 화형당하자, 분노한 압둘라 2세는 폭격기를 대거 동원해 IS를 공격했다. 당시 그가 비행복을 입고 공군 기지 활주로에 나와 직접 공습을 지휘하는 모습에 서방은 박수를 보냈다. 영국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압둘라 2세는 공격용 헬기 조종사 자격을 갖고 있다.

서방 언론은 압둘라 2세와 18세 어린 이복동생 함자 왕자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벌어진 것에 놀랍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요르단에서 국왕은 모든 권력을 쥐고 있다. 압둘라 2세가 22년간 재임하는 동안 통치 체제상 불협화음이 외부에 노출된 적은 없다.

1999년 요르단을 47년간 통치한 후세인 1세가 별세하자 장남인 압둘라 2세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선친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후세인 1세가 11남매 가운데 가장 애지중지했던 이복동생 함자 왕자를 왕세제로 책봉했다. 함자 왕자는 후세인 1세의 네 번째 부인인 미국계 누르 왕비의 아들이다. 그러나 압둘라 2세는 2004년 함자 왕자에게서 왕세제 지위를 빼앗고 자신의 장남인 후세인 왕자를 새 왕세자로 책봉했다. 당시 함자 왕자는 압둘라 2세에 대항하지 않았고, 이후로도 특별한 갈등이 노출되지 않았다.

요르단 왕실의 함자 왕자(왼쪽)와 그의 아내. 2012년 모습이다. 함자 왕자는 미국 하버드대와 영국 샌드허스트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했다./AFP 연합뉴스

그러나 이날 공개된 동영상을 보면 함자 왕자가 압둘라 2세 체제에 상당한 불만을 가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는 “국가 지도자들이 부패했고 무능하다”며 “내가 참석한 모임에서 정부나 국왕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왔기 때문에 가택 연금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BBC는 “그동안 눌러왔던 내부 갈등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면서 요르단 왕실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했다.

요르단은 근년에 심각한 불황에 시달렸으며, 코로나 사태로 큰 타격을 입어 민심이 동요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요르단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친(親)이스라엘 정책에 동조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경제적 원조를 받았는데, 이것이 내부 갈등을 키우고 있다. 전체 국민의 5분의1에 달하는 팔레스타인계 국민들이 반발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서둘러 압둘라 2세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요르단은 미국의 주요 동맹국이며 우리는 압둘라 2세를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했다. 미국의 우방 사우디아라비아도 “요르단 국왕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확인한다”고 했다. 요르단은 시리아 난민 60여만명을 흡수해 서방의 부담을 덜어준 나라다. 또한 중동에서 가장 현대화된 무기 체계를 갖춘 군사 강국으로 꼽힌다. 이런 이유들로 미국과 서방은 요르단이 안정적인 통치 체제를 유지해 우방으로 남아주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