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정치 지형이 16년 만에 뒤집혔다. ‘유럽의 트럼프’로 불리던 오르반 빅토르 총리가 총선에서 패배하며 2010년 이후 이어진 장기 집권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번 선거는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유럽 내 포퓰리즘 정치의 향방과 미국·러시아, 유럽연합(EU) 간 세력 균형에도 영향을 미칠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12일(현지 시각) 실시된 총선에서 야당 티서(Tisza)는 전체 199석 중 138석을 확보하며 압승했다. 여당 피데스는 55석에 그쳤다. 티서 의석은 개헌선인 3분의 2(133석)를 넘어서는 규모다. 티서를 이끄는 머저르 페테르 대표는 “헝가리 국민은 유럽연합(EU) 가입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된 지 정확히 23년 만에 다시 한번 역사를 써냈다. 헝가리는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강력한 동맹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오르반 총리는 “선거 결과는 고통스럽지만 명확하다. 승리한 정당에 축하를 전한다”며 패배를 인정했다.
◇‘부패·경제난’에 민심 이반
이번 선거의 핵심 쟁점은 부패와 경제였다. 현지에서는 “부패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수준”이라는 유권자 반응이 잇따랐다. 오르반 정부는 사법부와 언론 등을 통제하며 권력을 집중시켜 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헌법과 제도 곳곳에 여당에 유리한 장치를 심어 정권 유지에 활용했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등에 따르면 헌법에 정권 교체 이후에도 정책 추진을 어렵게 하는 ‘독소 조항’이 다수 포함돼 있어 새 정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개헌선 확보가 필수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티서가 전체 의석의 3분의 2, 133석을 ‘매직 넘버’로 삼아 목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 상황 역시 악화됐다. 물가 상승과 공공 서비스 저하가 이어지며 국민의 불만이 누적됐고, 부패 문제와 결합해 정권 심판론으로 확산됐다. 특히 기존 야권이 분열돼 있던 구조를 깨고 머저르 대표가 중심으로 결집한 것도 승리의 요인으로 꼽힌다.
◇미국·러시아 밀착 노선 심판
헝가리의 외교 노선 역시 이번 선거의 핵심 변수였다. 특히 이번 선거는 트럼프·푸틴 등 ‘스트롱맨’들과 EU 정상 간 대리전으로 번져 전 세계 이목을 끌었다. 오르반과 반(反)이민·기독교 정체성을 공유하는 트럼프는 7일 JD 밴스 부통령을 헝가리에 급파해 선거 유세를 지원하도록 했다. 이날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헝가리·미국 우호의 날’ 행사에서 밴스는 트럼프와 즉석으로 통화를 연결했고, 트럼프는 “오르반은 훌륭한 일을 해내는 사람”이라며 “다른 나라처럼 이민자들이 당신들의 나라(헝가리)를 침략하고 망쳐놓는 것을 막았다”고 추켜세웠다. 밴스 역시 “주권과 민주주의, 진실을 지키길 원한다면 투표소에 가서 오르반과 함께하라”고 말하는 등 노골적으로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이란 전쟁을 둘러싼 부정적 여론 여파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평가다.
오르반 총리는 러시아와의 에너지 협력을 유지하며 EU의 대러시아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 등 EU 정책에 제동을 걸어오기도 했다. 반면 머저르 대표는 NATO와의 협력 복원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유럽 복귀’를 전면에 내걸었다. 이에 이번 선거 결과는 사실상 친러 노선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야당 승리 소식에 유럽 주요 정상들은 일제히 환영 입장을 밝혔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헝가리는 유럽을 선택했다. 한 나라가 유럽으로의 길을 되찾았다”고 환영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헝가리 국민이 EU의 가치와 유럽에서의 헝가리의 역할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라고 평가했고,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도 “유럽의 민주주의에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밝혔다.
◇유럽 포퓰리즘에 ‘경고등’
이번 선거는 유럽 전반의 정치 지형에도 적잖은 파장을 미칠 전망이다. 오르반은 지난 16년 동안 포퓰리즘 보수 정치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미국의 MAGA 진영과 유럽 극우 세력의 ‘롤모델’로 평가받아왔다. 하지만 이번 패배는 이러한 흐름이 무한히 확장되지 않을 수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선거 당일 밤 수도 부다페스트에서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승리를 자축했고, 일부는 “러시아는 떠나라”는 구호를 외쳤다. 16년간 이어진 ‘오르반 시대’가 막을 내리며, 헝가리는 다시 유럽 중심으로 복귀할 중대한 갈림길에 서게 됐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