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 정권의 ‘어둠의 은행가’들이 해킹으로 탈취한 암호화폐를 국제사회 제재를 피해 현금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6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 법무부의 기소장을 토대로 자금 세탁·제재 회피 혐의를 받는 심현섭의 범행 수법을 보도했다.
심현섭은 미 연방수사국(FBI)이 쫓고 있는 인물로, 지난 7월 현상금이 500만달러에서 700만달러(약 100억원)로 올랐다. 미 수사 당국에 따르면 1983년 평양 출생으로 추정되는 심은 미국의 제재 리스트에 오른 북한 조선무역은행 소속이다. 그는 주로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UAE)에서 활동했는데, 해외에서는 위장 신분으로 광선은행 대표 직함과 ‘심 알리’ ‘심 하짐’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심의 현금화·세탁 과정은 치밀했다. 북한의 ‘IT 일꾼’들은 해킹을 통해 탈취하거나 급여로 받은 암호화폐를 심에게 보냈다. 추적이 어렵게 디지털 지갑(월렛)을 여러 차례 거쳤다. 이후 심은 미리 매수한 UAE나 중국의 브로커에게 암호화폐를 건네 달러로 바꾸고, 브로커들은 이 돈을 다시 여러 거래를 거쳐 세탁한 뒤 홍콩 등지에 심이 설립한 유령 회사 은행 계좌로 이체했다. 러시아·중국·아프리카 등지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이 번 외화도 세탁 과정을 통해 심의 계좌로 들어왔다. 2021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암호화폐 개발자는 자신이 원격으로 고용한 싱가포르의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에게 21만6000달러(약 3억1000만원) 상당의 암호화폐를 급여로 지불했는데, 이는 심의 지갑으로 흘러간 것으로 조사됐다. 2019년 탈북한 류현우 전 주쿠웨이트 북한 대사대리는 26일 본지 통화에서 “2016년부터 약 3년 반 동안 심과 10여 차례 만나 얘기를 들었다”며 “심은 돈이 되는 건 거의 다 만졌다. 자금 세탁과 관련된 일이라면 아랍 지역에서 가장 유용한 인물이었다”고 했다.
심은 이렇게 확보한 자금을 북한으로 송금하지 않고, 직접 김정은 정권을 위한 물품을 구입했다. 북한과의 연계성을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한 것이다. 2019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헬기를 구매해 북한으로 배송하는 데 심이 세탁한 30만달러가 쓰였다. 이 돈은 짐바브웨의 한 로펌을 거쳤다. 김정은 사치품 구매와 무기 개발 자금 등으로도 세탁 자금이 사용됐다. 심은 북한의 주요 수익원인 위조 담배 제조를 도울 목적으로 약 80만달러를 담배 원료 대금으로 지불하기도 했다.
시티은행·JP모건·웰스파고 등 미국 은행들도 심의 자금 세탁을 눈치채지 못했다. 수사 당국이 확보한 심의 이메일과 거래 내역 등에 따르면 세탁 자금의 상당 부분이 미국 금융 시스템을 거친 것으로 파악됐다. 최소 310건의 거래가 미국 은행을 통해 이뤄졌고, 규모는 약 7400만달러(약 1064억원)에 달한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에 따르면 심 외에도 해외에서 자금 세탁을 하는 북한 어둠의 은행가는 지난해 기준 50명을 웃돈다. 암호화폐 절도를 추적하는 ‘체이널리시스’ 자료에 따르면 북한 은행가들은 몇 년에 걸쳐 탈취된 암호화폐 60억달러(약 8조6000억원) 이상을 북한을 위해 세탁했다.
미국의 제재 대상국인 이란과 북한 정권 간의 자금 거래 흔적도 포착됐다. TRM 랩스 추적 결과 지난 2월 심의 암호화폐 지갑에서 최소 6만7000달러(약 9600만원)가 이란 혁명수비대 소유의 지갑으로 흘러간 것으로 조사됐다. 이란이 북한으로부터 암호화폐를 건네받아 달러로 교환해 줬거나, 석유 대금으로 지불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류 전 대사대리는 “두바이 출장을 가면 심이 일본 도요타 차를 몰고 공항에 마중 나왔다”며 “심은 굉장히 똘똘한 사람이었다. 말투는 수더분하며 친화력이 좋았다”고 했다. 평양외국어대 출신으로 영어·중국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류 전 대사대리는 “심은 2022년 중국 단둥으로 홀로 건너간 뒤 현재는 아내와 외동딸과 함께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2023년 3월 미국 워싱턴 DC 연방지법은 심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했지만, 현재로선 그를 체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WSJ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