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새벽 폴란드에서 출발한 기차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중앙역에 도착하자 승강장이 사람들로 붐볐다. 국외에서 우크라이나로 가려면 폴란드 등에서 출발해 10시간 넘는 밤 기차를 타야 한다. 기자가 취재하며 도합 4일 밤을 탑승한 우크라이나 열차는 수시로 공습경보가 울리는 호텔보다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키이우=김신영 기자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중앙역 조명이 조용히 꺼졌다. 이달 초 어느 날 밤, 얇게 뿌리는 눈 가운데로 천천히 검푸른 열차가 들어왔다. 승객을 비운 승강장엔 구급차 마흔대가 웅크리고 서 있다. 기차 문이 열리자 눈 감은 채 움직이지 않는 젊은이들이 들것에 하나둘 실려 나왔다. 밤공기 속에 가늘게 흔들리는 하얀 숨만이 이들이 살아 있다는 생명의 신호를 보냈다. 보온 담요로 몸을 휘감은 부상병들의 모습은 3000㎞가 넘는다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戰線)에서 진짜 사람이 싸우고 다치고 죽어간다는 전쟁의 참상(慘狀)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적 가운데 이들은 약 한 시간에 걸쳐 구급차에 실려 차례로 역을 떠났다. 이 열차는 어느 곳에도 일정이 올라 있지 않은, 극비리에 이동하는 우크라이나의 의료 열차다. 지난해 2월 러시아 침공으로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전장에서 싸우다 다친 우크라이나 부상병을 후송하기 위해 ‘병원 열차’로 개조됐다.

우크라이나 면적은 한국(북한 제외)의 약 6배 수준이다. 유럽에서 가장 넓다. 전쟁 발발 후 도로가 파손되고 하늘길이 막힌 지금의 우크라이나에선 기차만이 전장의 도시를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부 무역선(船)을 제외하면 우크라이나를 다른 나라와 연결하는 교통수단은 기차가 유일하다. 전선으로 병사를 실어나르고, 부상병을 후송하는 전장의 구급차 역할도 기차가 하고 있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최전선에서 부상한 군인들을 병원이 있는 도시로 실어나르는 우크라이나 병원 열차의 내부. /우크라이나 철도청

후송된 부상병들이 병원으로 모두 옮겨지고 나서 들어가 본 병원 열차 안은 진한 소독약 냄새로 가득했다. 기차 한 칸엔 병상이 5~8개씩 놓였고 산소 마스크와 생명 유지 장치도 보였다. 한 직원은 직전까지 병사에게 수혈했을 혈액 주머니를 옮기고 있었다. 이 기차 출발지를 묻자 올렉산드르 페르초우스키 우크라이나 철도청 승객 부문 국장은 “기밀 정보다. 7시간 걸려 왔다는 것만 알려줄 수 있다”고 했다. 역의 조명은 최근 늘어난 러시아의 드론(무인기) 공격 등을 막으려 꺼두었다고 했다.

현지에서 만난 우크라이나인들은 전쟁 후 하루도 멈추지 않은 우크라이나 철도를 ‘제2의 군대’, 철도청 직원을 ‘강철 사람들’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등을 포함한 G7(7국) 정상 전원, 기자, 구호 단체, 정부·기업 관계자들은 모두 폴란드 등에서 10시간 넘는 밤기차를 타고 우크라이나로 들어간다. 키이우에서 오데사·미콜라이우 같은 주요 도시로 이동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 또한 야간 기차다. 우크라이나 비영리 기구 PIJL(공익 저널리즘 랩) 나탈리야 구메니어크 대표는 “암흑 속에 달리는 기차는 러시아가 드론으로 공격하기가 매우 어렵다. 밤낮없이 수시로 공습경보가 울리는 우크라이나에서 기차 침대칸은 그나마 숙면을 취할 수 있는 장소”라고 했다. 이번 우크라이나 방문 때 기차에서 4박을 했다. 첫 탑승 땐 덜컹거려 불편하다 생각했지만 한 번 더 탈 때마다 점점 익숙해졌다. 공습경보로부터 자유로운 기차의 밤이 호텔보다 평화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움직이는 기차는 공격이 쉽지 않지만, 약 2만㎞ 철로와 역사는 때때로 러시아 드론 등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철도청은 기차가 멈추는 사태를 최소화하기 위해 철로 주변에 수리 인력을 촘촘히, 상시 배치하고 파괴 즉시 수리하고 있다. 페르초우스키 국장은 “‘러시아가 부수면, 더 빨리 고친다’ 이것이 우리 모토”라고 했다.

전쟁으로 도로가 파손되고 하늘길이 막힌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기차를 ‘제2의 군대’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우크라이나 철도청은 러시아 공습에 대비해 철로 주변에 수리 인력을 상시 배치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철도청

우크라이나의 기차는 개전(開戰) 초기 피란민을 후방으로 실어나르는 생명줄 역할을 했다. 전쟁이 발발한 지난해 2월 24일 오전 ‘모든 기차 무료’를 발표한 후 전방 격인 남동부에서 후방으로 피란민 400만명을 옮겼다. 32년 차 열차 승무원 샤리포브 비탈리사비로비치씨는 “36인용 객차에 150명 넘게 타야 할 때도 잦아 바닥까지 승객이 꽉 찼었다”고 했다. “피란민의 흐느낌과 반려동물의 울음으로 열차 내부는 혼란했지만 기적적으로 다친 사람 없이 피란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전장에서 남편이나 아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기차에서 알게 된 승객이 오열할 때 가장 괴로웠어요.”

키이우를 떠나는 날 역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러시아에 점령된 도시의 이름을 적은 기차 시간표 전광판이었다. 지금은 닿을 수 없는 도시들이지만 수복되는 날 출발할 ‘첫차’ 시각이 적혀 있다. 철도청은 지난해 ‘언젠가’가 될 이들 기차의 표를 판매했는데 금세 매진됐다. 실제로 우크라이나가 남부 도시 헤르손을 지난해 11월 되찾았을 때 피란민들은 키이우로 피했던 그날처럼, 다시 기차를 타고 헤르손으로 돌아갔다. 중앙역에선 이 전광판을 새긴 셔츠를 팔고 있었다. 수익금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재건 비용으로 모두 기부한다고 한다. 첫 줄에 ‘승리: 도착 시각 2024′라고 적힌 셔츠를 사서 가방에 넣고, 폴란드로 향하는 밤기차에 올랐다.

우크라이나 키이우역에 있는 전광판에서는 러시아에 점령된 도시의 이름과 언젠가 수복되는 날 출발할 '첫차' 시각이 적혀 있었다. 이미 수복돼 열차 운행이 재개된 헤르손은 흰색으로 색이 바뀌어 있다. 첫 줄에 적힌 PEREMOHA는 '승리'라는 뜻이다. /키이우=김신영 기자

-

🌎조선일보 국제부가 픽한 글로벌 이슈!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39

🌎국제퀴즈 풀고 선물도 받으세요! ☞ https://www.chosun.com/members-event/?mec=n_qu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