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1807~1870) 장군은 부쩍 격화된 흑백 인종갈등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비록 노예제를 지지하는 남부군을 이끌다 항복한 패장(敗將)이었지만, 인품과 지략이 뛰어난 군인이었으며, 남북전쟁후 미국의 단합을 위해 노력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인 2017년 8월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시 당국의 동상 철거 방침에 반대하는 백인우월주의단체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인뒤 미 전역의 흑백갈등으로 번지면서 분열과 갈등을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루벤스타인의 기부로 대대적인 개보수를 마치고 최근 개관한 로버트 리 장군의 고택 알링턴 하우스. /미 국립공원관리청(NPS)

그 로버트 리의 고택인 버지니아주 ‘알링턴 하우스’가 최근 3년여간의 대대적인 개보수를 마치고 지난달 8일 다시 문을 열었다. 낡은 외관과 내부 시설을 말끔하게 손보고 당시 역사를 말해주는 전시·교육시설을 대폭 보강했다. 특히 이번 개보수를 통해 이 집의 주인이었던 로버트 일가 뿐 아니라 이곳에서 살았던 100여명의 흑인 노예들의 살아간 자취를 알려주는 전시공간도 새로 들어섰다. 분열의 상징에서 역사를 다양하게 배우고 화합을 꾀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미 국립공원관리청(NPS) 알링턴하우스 전시 공간 내의 로버트 리 장군 동상.

알링턴하우스를 관리하는 미 국립공원관리청(NPS)은 “우리의 목표는 이곳을 대화와 학습의 장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방문자들이 호기심을 갖고 당시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렵고 불편할 수 있는 질문도 꺼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개보수에는 1235만 달러(약 139억4315만원)이 투입됐는데 연방 예산이 아닌 한 사람의 기부로 이뤄졌다. 월가의 대표적인 큰손인 사모펀드 칼라일그룹의 창립자 겸 회장 데이비드 루벤스타인(72)이다. 그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변호사를 거쳐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보좌관을 지낸 뒤 칼라일을 창업해 굴지의 사모펀드로 키워냈다. 냉혹한 기업사냥꾼으로 이름을 떨친 그의 또 다른 면모는 기부천사다. 그는 공익 사업에 여러 차례 통크게 기부해왔다.

개보수를 통해 새로 마련된 흑인노예 제임스 파크스의 흉상. 칼라일 그룹 루벤스타인 회장의 기부로 이곳은 남북전쟁 당시 고단하게 살았던 흑인노예들의 삶을 기리는 전시물들도 대거 갖추게 됐다. /미 국립공원관리청(NPS)

그는 2010년 워런 버핏, 빌 게이츠 등 세계적 부호들과 함께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고, 3년 뒤인 2013년에는 재산의 95%를 기부하겠다는 계획까지 밝히고 꾸준히 기부를 해오고 있다. 루벤스타인은 “NPS가 알링턴 하우스가 흑인들의 삶까지 이야기하는 공간으로 새단장될 수 있도록 훌륭한 일을 해냈다”고 했다. 이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으면 좋겠다”면서 “알링턴 하우스가 가진 풍부면서도 복잡한 역사적 유산은 인종적 정의와 관련한 대화를 한층 의미있게 해줄 것”이라고도 말했다.

조선일보DB 알링턴하우스를 인종화합을 위한 교육전시공간으로 재단장하도록 거액을 쾌척한 데이비드 루벤스타인 칼라일그룹 회장.

그의 기부액으로 개보수된 알링턴 하우스에는 남북전쟁을 전후해 이곳에서 살았던 흑인노예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고달팠던 삶과 이야기를 다룬 전시물들이 새롭게 들어섰다. 이에 따라 이 집의 주인이었던 리 장군 뿐 아니라 함께 살았던 사이팩스, 버크, 파크스, 그레이 등의 성을 가졌던 노예들의 삶을 조명한 전시물들이 관람객들과 만나고 있다. 이런 방향으로 개보수를 하는 과정에서 NPS는 리 장군 및 흑인 노예들의 후손과도 연락을 하고 의견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앞서 루벤스타인은 미국 수도 워싱턴DC의 명물인 워싱턴기념탑이 2011년 지진으로 훼손됐을 때도 보수비용을 쾌척했다. 그 해 12월 미의회가 통과한 수리비용에 맞춰 매칭펀드처럼 750만 달러를 기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