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공영방송인 영국 BBC가 1995년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인터뷰를 성사시키기 위해 속임수를 썼다는 사실이 26년 만에 드러나면서 궁지로 몰리고 있다. 수신료 동결·삭감이 논의되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로부터 강한 쇄신 압박을 받고 있다.

영국 런던에 있는 BBC 방송국의 모습. /EPA 연합뉴스

더타임스 주말판인 선데이타임스는 이번 ‘인터뷰 사기 사건’의 파장으로 정부가 BBC 수신료를 내년부터 5년간 동결 내지 삭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22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BBC 수신료는 올해 가구당 159파운드(약 25만5000원)이며, BBC의 한 해 수신료 수입은 32억파운드(약 5조1300억원)에 이른다. 2015년 이후 수신료를 물가 상승률에 준해 매년 인상해왔다. 익명의 영국 정부 고위 관계자는 “세계를 선도하는 방송사라는 BBC의 명성이 훼손됐으며 이것이 수신료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선데이타임스에 말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21일(현지 시각)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BBC가 가능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를 바란다”고 말해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영국 정부는 기존 BBC 이사회와 별도로 활동하는 새로운 편집위원회를 신설하는 만드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1995 년 11 월 21 일 BBC 기자 마틴 바시르와 다이애나 비의 BBC 텔레비전 인터뷰를 영국의 대부분의 신문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AP 연합뉴스

다이애나는 1995년 BBC 인터뷰에서 “이 결혼에는 셋이 있었다”며 남편 찰스 왕세자의 불륜을 폭로했고, 이것이 왕실과 결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인터뷰를 성사시키기 위해 BBC가 속임수를 썼다는 의혹 제기가 끊이지 않았는데 최근 조사 결과 인터뷰를 했던 마틴 바시르 기자가 날조된 은행 계좌 서류 등을 활용하는 등 속임수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다이애나의 아들인 윌리엄 왕세손은 “가짜 뉴스의 시대에 공영방송은 매우 중요하다”며 “BBC의 잘못은 내 어머니와 우리 가족뿐 아니라 영국의 대중도 무너뜨렸다”고 했다.


BBC가 26년 전 다이애나 왕세자빈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위조 서류를 동원하고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을 계기로 영국 정부가 BBC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예고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21일(현지 시각) “왕실 인사들의 (BBC에 대한 분노의) 감정에 공감하며 분명히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BBC가 가능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BBC를 손보겠다며 작심한 것으로 보인다. 일간 가디언은 “장관들이 ‘BBC의 신뢰 회복을 위해 개입하겠다’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먼저 보수당 정부는 BBC의 수신료를 동결하거나 인하해서 재정 부문을 수술할 예정이다. 가구당 159파운드(약 25만5000원)에 달하는 BBC 수신료가 지나치게 비싸다는 불만을 가진 영국인들이 적지 않다. 상당수 보수당 의원들은 BBC가 이번 기회에 수신료를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년부터 5년간은 수신료 동결 내지 인하로 BBC를 압박하겠지만 2027년부터는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영국 언론들은 내다보고 있다.

현재 BBC 정관은 1927년 공사로 출범할 때 제정된 것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정관의 효력(100년)이 종료되는 2027년에는 BBC가 완전히 다른 형태의 방송 서비스 기업으로 바뀔 가능성이 적지 않다.

더 타임스는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본질적으로 과세(수신료 징수)의 방식으로 자금을 지원받는 국영 방송을 유지해야 하느냐에 대해 논란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 내에서 BBC 수신료를 아예 없애는 방안과 BBC를 넷플릭스처럼 실제 시청자만 돈을 내는 가입자 기반 서비스로 바꿔야 한다는 방안까지 모두 논의되고 있다고 영국 언론들은 전했다.

BBC 보도에 대한 시청자들의 불만을 수용하는 방식에도 대대적인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영국 정부는 기존 이사회와 별도로 중립적인 미디어 전문가들이 참여해 BBC 보도에 대한 불만을 처리하는 새로운 편집위원회를 내년에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현재도 시청자 불만을 접수하고 있지만 내부 인사들이 처리하기 때문에 객관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더타임스는 “의회 내에서 21세기 BBC는 완전히 다른 조직이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어 급진적인 개혁이 진행될 분위기”라고 했다.

존슨과 보수당 정부가 BBC 개혁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평소 BBC가 보수당에 적대적이었다는 불만이 작용하고 있다. 보수당은 BBC가 ‘친(親)노동당’ 성향이라며 성토해왔다. 2015년 총선 당시 보수당 중진들은 “BBC가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당 편향적인 선거 보도를 했다”고 비난했다. 2019년 총선에서는 보리스 존슨 총리가 BBC 출연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사건이 발생하자 “BBC를 개혁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보수당 내에서 일고 있는 것이다.

존슨은 또한 BBC 수신료를 내지 않았을 때 형사처벌하는 제도가 지나치게 가혹하다며 바꿔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2012년 BBC는 1980년대 마거릿 대처 총리의 측근이 아동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보도를 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일이 있었다. 보수당과 대처 지지자들의 강력한 항의로 조지 엔트위슬 BBC 사장이 취임 두 달 만에 사퇴했다.

다이애나를 속인 마틴 바시르 기자를 옹호한 ‘몸통’으로 지목된 토니 홀(2013~2020년 재임) 전 BBC 사장은 22일 국립미술관 이사장직에서 사퇴했다. 홀 전 사장은 보도 총괄로 일하던 1996년 다이애나 인터뷰 과정에 대한 자체 조사에서 “바시르는 정직하고 명예를 지키는 사람”이라며 감쌌고, 사장으로 재임하던 2016년 바시르를 종교전문기자로 다시 채용했다. 경찰은 바시르에 대해 수사를 개시할 필요가 있는지 검토하고 있다. 스펜서 백작은 크레시다 딕 런던 경찰청장을 만나 누나가 협박과 사기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바시르는 선데이타임스 인터뷰에서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손 형제에게 매우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이애나를 (인터뷰로) 위험에 빠뜨릴 의도가 없었고 다이애나가 인터뷰에 불만을 표시한 적도 없다”고 항변했다. 그는 다이애나가 인터뷰 직후 고맙다는 취지로 보내온 자필 편지와 1996년 셋째 아이를 낳았을 때 다이애나가 병원에 찾아와 자신의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며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