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별세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남편 필립공/AFP 연합뉴스
9일 별세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남편 필립공/AFP 연합뉴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남편 필립 공(99)이 9일(현지 시각) 별세했다고 버킹엄궁이 밝혔다. 버킹엄궁은 이날 성명을 내고 “필립 공이 오늘 아침 윈저성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필립 공은 오는 6월 10일 만 100세 생일을 맞기까지 불과 62일 남겨두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1947년 영국 국왕 조지 6세의 딸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한 지 74년 만이고, 1952년 엘리자베스 공주가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여왕의 남자’가 된 지 69년 만이다. 그는 영국 국왕의 배우자로서 가장 긴 기간을 살았던 사람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그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윈저궁 앞에 꽃다발을 든 영국인들이 몰려들어 추모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큰 슬픔을 느낀다”며 “많은 젊은이들의 삶에 영감을 불어넣은 분”이라고 했다.

필립 공은 몸에 이상을 느껴 지난 2월 16일 입원했다. 하지만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심장 이상 증세까지 나타나 심장 수술을 받고 3월 16일 퇴원했다. 그는 쇠약해진 기미가 역력했고 마지막 며칠을 여왕과 함께 보냈다고 영국 언론들은 전했다.

2015년 6월 13일 영국 엘리자베스(가운데 흰 옷) 2세 여왕의 생일을 맞아 영국 왕실 가족들이 버킹엄궁 발코니에 모였다. 여왕과 남편 필립(여왕 오른쪽으로 둘째)공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AFP 연합뉴스

필립 공은 1921년 6월 10일 그리스 이오니아해에 있는 코르푸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리스 왕자 앤드루, 어머니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인 앨리스 공주다. 그에게는 덴마크와 노르웨이 왕가의 혈통도 흐르고 있다. 그는 1939년 영국 다트머스해군대학 사관 후보생이던 시절 이 학교를 방문한 엘리자베스 공주를 만났다. 당시 13세의 여왕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아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키가 1m83㎝로 훤칠한 필립 공에게 엘리자베스 공주가 먼저 반했고, 영국군 장교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필립 공에게 편지를 자주 썼다고 한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지만 결혼까지 순탄하지 않았다. 필립 공은 그리스 정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영국 왕실의 성공회와는 거리가 있었다. 필립 공의 누나들이 결혼한 독일 남성들이 나치 지지자라는 주장이 제기돼 영국에서 결혼에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필립 공은 가진 것을 버렸다. 1947년 초 그리스 왕실에서의 직위와 권리를 모두 포기하고 영국인으로 귀화한 뒤 그해 11월 여왕과 결혼해 74년간 곁을 지켰다.

그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짐이나 가방을 옮기는 일을 왕실 직원에게 맡기지 않았다. 버킹엄궁에 내부 통신용 전화를 설치하기도 했다. 왕실 직원들이 여왕에게 전달할 메시지를 서면으로 써오는 수고를 더 이상 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는 전기 프라이팬으로 아침 식사를 직접 만들어 먹는 것도 즐겼다.

74년 전 결혼식 - 1947년 11월 20일 영국 엘리자베스(왼쪽) 2세 여왕과 남편 필립공이 결혼식을 올린 날 두 사람이 버킹엄궁 발코니에서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 /AP 연합뉴스

BBC는 그가 “너무 튀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여왕인 아내 뒤에서 숨죽여 지낼 수만도 없는, 세상의 어떤 남자보다 특별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는 여왕의 남편으로 처신하기 어렵다는 고충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왕의 남편으로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아무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필립 공은 연간 수백 번에 이르는 여왕의 공식 일정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자신만의 사회 활동도 했다. 1956년 남극을 방문한 그는 이때부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철학을 강조하며 50년 넘게 강연을 다녔다. 세계야생동물기금 초대 회장을 지낸 것을 비롯해 그가 회장, 회원, 후원자 등을 맡아 인연을 맺은 단체가 780여 개에 이른다. 생전에 그가 방문한 나라는 143국에 이른다.

평소 직설적인 편인 그는 설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1984년 케냐를 방문했을 때 현지인 여성에게 “여자가 맞느냐”고 물어 구설에 올랐다. 1986년 중국에 가서는 현지 영국인들에게 “중국에 오래 있으면 중국인들처럼 눈이 찢어진다”고 말해 인종차별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아픔을 겪은 순간도 있었다. 1997년 며느리였던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졌고, 둘째 손자인 해리 왕손이 올해 왕실과 완전히 결별하는 일도 겪었다.

필립 공은 건강한 체질이었지만 90대에 들어서면서 나이를 속이지 못했다. 2011년 관상 동맥에 스텐트 수술을 받았다. 2012년에는 여왕의 즉위 60주년 행사에서 오래 서 있었던 후유증으로 급성 방광염을 얻어 고생했다. 2017년에는 고령을 이유로 왕실 업무에서 공식 은퇴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사이에 3남1녀를 뒀다. 4남매 중 첫째인 찰스(73) 왕세자와 둘째 앤(71) 공주는 70대에 들어섰다. 윌리엄(39) 왕세손을 포함한 8명의 손자가 있다. 증손자는 10명이다. 앤 공주는 평소 “잠자기 전에 이야기를 들려주고 함께 놀아주던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