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총리 관저를 뜻하는 ‘다우닝가 10번지’가 벌집 쑤신 듯 시끄럽다. 보리스 존슨 총리가 총애하던 총리실 공보국장이 11일(현지 시각) 갑자기 사직 의사를 밝혔는데, 존슨의 약혼녀 캐리 시먼즈와의 불화 끝에 사실상 쫓겨난 것에 가깝다고 영국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퍼스트 걸프렌드’가 권력 핵심부 인사를 좌지우지한다는 이야기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리 케인 총리실 공보국장은 “총리의 공보 담당자로 일하며 영광을 누렸지만 이제 떠나기로 결심했다”며 성명을 냈다. 존슨은 “케인이 그동안 훌륭하게 봉사해줘 고맙다”고 했다.
케인은 존슨이 외무장관이던 시절부터 최측근이었다. 지난해 7월 존슨이 총리로 취임하면서 공보국장으로 임명된 케인은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메시지 전파를 총괄했다. 이런 케인이 갑자기 사직한 이유는 존슨과 틀어진 게 아니라 존슨의 약혼녀인 시먼즈와 암투 끝에 힘에서 밀렸기 때문으로 전해졌다. 일간 더타임스는 “존슨이 케인을 한 단계 승진시켜 선임보좌관을 맡기려고 하자 시먼즈가 강하게 반대했으며, 이에 따라 알력 다툼이 벌어진 끝에 아예 케인이 총리실을 떠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존슨이 제 뜻대로 보좌진 인사도 못 할 만큼 약혼녀에게 끌려다닌다는 이야기다.
시먼즈는 평소 자기주장이 뚜렷하다. 정치 홍보 전문가 출신으로 보수당의 홍보 책임자로 일한 이력이 있다. 그래서 총리실 공보 업무에 대해 입김이 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언론들은 시먼즈가 애초부터 케인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특히 올해 코로나 사태를 둘러싸고 총리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며 불만을 표시했다고 전했다. 시먼즈는 존슨보다 스물네 살이 어린 32세다. 두 번 이혼한 존슨과 동거하다 다우닝가 10번지에 입성했다. 이후 작년 연말 존슨과 약혼했고, 올해 4월에 아들을 출산했다.
이번 총리실 인사 파동은 케인이 떠나는 것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존슨의 보좌진 중 가장 직급이 높은 도미닉 커밍스 수석보좌관도 밀려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커밍스와 케인은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다. 더타임스는 “커밍스가 시먼즈를 찾아가 총리의 구상대로 케인을 승진시켜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고 전했다. 커밍스가 막후에서 권력을 전횡한다며 여야가 일제히 성토할 때도 존슨은 꿈쩍 않고 커밍스에게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시먼즈 앞에서는 커밍스마저도 힘을 못 쓰는 모양새다.
한편 존슨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손절’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이날 하원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트럼프를 가리켜 “전임(previous)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썼다. 아직 트럼프가 퇴임하기 이전인데도 ‘다 끝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트럼프와 끈끈했던 존슨이 조 바이든 당선인 시대를 맞아 트럼프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평가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