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시가 시내 중심부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하라는 명령을 전격적으로 철회했다. 일본군 위안부를 상징하는 소녀상에 대해 일본의 요구를 받고 철거 명령을 내렸지만, 각계의 반발이 확산되자 일단 그대로 두기로 번복한 것이다.

베를린 시내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프리츠 슈만씨 제공

베를린시는 13일(현지 시각) 보도자료를 내고 “논란이 있는 ‘평화의 소녀상’이 당분간 그대로 있을 것”이라며 “법원이 (소녀상에 대한) 기본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베를린시는 어떠한 추가적인 결정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철거 명령을 중단시켜달라는 가처분 신청이 법원에 제기된 점을 받아들여 철거를 강행하지 않고 일단 그대로 두겠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13일(현지 시각) 소녀상을 당분간 그대로 두겠다며 베를린시가 발표한 보도자료/베를린시

독일 내 민간단체인 코리아협의회는 지난달 28일 베를린 미테구청의 허가를 얻어 독일의 공공 장소에서는 처음으로 미테구에 소녀상을 설치했다. 하지만 아흐레만인 지난 7일 미테구청은 14일까지 자진 철거하지 않으면 강제로 소녀상을 뜯어내겠다고 코리아협의회에 통보했다. 일본이 전방위적인 외교전을 벌여 베를린시측이 소녀상을 철거하도록 움직인 결과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일본은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외무상이 직접 독일 정부에 전화를 걸어 항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독일인들이 소녀상을 지켜보는 장면/프리츠 슈만씨 제공

그러나 소녀상 철거 명령이 독일 내에서 이슈로 떠오르며 각계에서 반발이 확산되자 베를린시가 부담을 느껴 입장을 번복한 것으로 보인다. 미테구청의 철거 명령에 대해 코리아협의회는 12일 철거 명령 집행을 정지시켜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베를린행정법원에 냈다. 독일 교민 및 독일인 300여명은 13일 “소녀상을 지키겠다”며 집회를 가졌다. 소녀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온라인 청원에 수천명이 서명했다.

특히 독일의 사민당, 녹색당, 좌파당이 일제히 소녀상 철거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 베를린시가 입장을 바꾸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사민당 소속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도 소녀상 철거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교민들이 소녀상과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프리츠 슈만씨 제공

베를린시는 슈테판 폰 다셀 미테구청장의 “일본측의 이해 관계뿐 아니라 코리아협의회의 이해관계도 반영하는 합의를 원한다”는 말을 보도자료에 소개했다. 한일 양측의 이야기를 듣고 합의점을 찾아보겠다는 의미다. 코리아협의회는 “소녀상에 일단 손을 대지 않기로 한 것은 다행”이라며 “베를린시와 논의가 시작되면 한·일간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여성 인권의 차원에서 소녀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할 것”이라고 했다.

13일 베를린에서 시민들이 소녀상에 대한 당국의 철거명령에 대해 항의하며 행진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소녀상과 관련해 논란이 뜨겁지만 외교부와 주(駐)독일한국대사관은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독일대사관측은 “공개할 수는 없지만 이번 사안에 대해 면밀히 대응하고 있다”며 “민간단체가 소녀상을 세운만큼 정부측에서 공개적인 대응을 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베를린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코리아협의회가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도움을 받아 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