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글로벌 패권 경쟁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전개되고 있는 와중에 월트디즈니 만화영화 ‘주토피아2’가 얼어붙은 두 나라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전 세계에서 개봉해서 미국과 한국 등 글로벌 흥행을 이어가고 있지만, 중국에서의 흥행 성적이 두드러진 것이다. 중국 관영 영문 매체 글로벌타임스는 8일 ‘주토피아2’가 중국에서 개봉한 지 12일 만에 30억2000만위안(약 6280억원)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고 보도했다.
이는 올해 중국에서 개봉한 영화 중 상위 3위 안에 드는 성적이고, 중국에서 개봉했던 역대 외국 애니메이션 1위에 해당하는 성적이라고 매체는 전했다. 인민망은 “북미와 동시 개봉된 이후, 이 영화의 중국 본토 누적 흥행 성적은 북미 시장을 훨씬 앞지르며 전 세계 최대 흥행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했다. 중국 관영 매체가 할리우드산 영화의 중국 내 열풍을 상세히 보도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영화 흥행에 힘입어 주인공 토끼 ‘주디’와 여우 ‘닉’의 인형 등 관련 상품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앞서 9년 전 개봉된 1편 역시 중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만큼 2편 역시 중국에서 어느 정도 흥행은 예감됐지만, 기대 이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미국과 중국이 안보·통상·첨단 산업 등 각 분야에서 벌이는 패권 전쟁으로 지구촌 정세가 요동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해외 언론들도 중국인들의 ‘주토피아 앓이’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캐나다 글로브 앤드 메일은 ‘중국은 왜 주토피아에 열광하나’라는 최근 기사에서 줄거리와 설정이 중국인의 기호와 맞아떨어진다는 문화적 요소를 짚었다. 캐릭터 자체에 대한 매력뿐 아니라 토끼와 여우가 손을 맞잡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서사가 조화를 중시하는 공산당 이념과도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디즈니를 대표하는 상징성이 있지만, 중국인들에게 공감을 얻기는 힘들었던 이른바 ‘디즈니 공주 캐릭터’들이 아닌 데서 오는 신선함도 인기의 요인으로 꼽힌다. 1편보다 한층 짙어진 동양적 요소도 중국 내 흥행 열풍의 원동력으로 꼽힌다. 1편에서는 남미산 동물인 나무늘보 등이 ‘신스틸러’로 등장하는 아시아적 색채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2편에서는 전 세계에 폭넓게 서식하는 독사 살모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는 뱀을 십이지의 하나로 여기며 일상생활에서 친숙하게 여겨온 동양 정서와 부합하는 측면도 꼽힌다. 더구나 2025년은 뱀띠해로 연중 뱀에 대한 각종 콘텐츠가 쏟아지는 시기인 만큼 개봉 시점이 절묘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올해는 푸른 뱀의 해로 알려졌는데, 공교롭게도 주토피아에 나오는 살모사도 선명한 푸른색이다. 주토피아는 1편 역시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지만, 할리우드 작품에 대한 문턱이 낮지 않았던 중국에서의 흥행이 단연 주목받았다. 당시 일각에서는 “자연의 약자인 양이나 토끼 등을 악당이나 영웅으로 묘사하는 등 기존의 질서를 왜곡하려는 선전 매체”라는 경계도 나왔다.
하지만 전례 없는 흥행을 이어가면서 ‘중국이 특히 좋아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고, 중국 관영 매체들도 자국의 ‘주토피아 앓이’를 긍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 같은 배경에는 생김새와 몸집, 기질이 제각각인 동물들이 협력하며 공존을 추구한다는 메시지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의 국가 특성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유독 주토피아 콘텐츠에 대한 중국인들의 사랑에 디즈니도 발 빠르게 대응했다. 2023년 12월 전 세계 디즈니 공원 중에서 최초로 주토피아를 주제로 한 동명의 테마 구역을 선보였다. 개봉 엿새 전인 11월 20일에는 상하이 디즈니랜드에서 출연진·제작진이 참석한 가운데 첫 시사회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