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22일 중국에 투자한 대만 대기업에 벌금을 부과하면서 “대만 독립을 지지하며 중국에서 돈을 버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만 기업에 독립 성향인 대만 민진당 정부와 손을 끊으라고 공개 경고한 것이다. 군수 기업을 제외하고 중국 정부가 정치적 이유를 내세우며 기업을 제재한 것은 전례 없는 일로 중국이 유지해 온 정경(政經) 분리 원칙을 사실상 폐기한 것이라는 해석까지 나온다. 중국에 투자한 한국 등 외국 기업이 유사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22일 상하이, 장쑤성 등 5개 지방 사법기관이 대만 위안둥(遠東)그룹이 투자한 화학섬유, 시멘트 기업을 조사해 벌금을 부과하고 유휴 임대 토지를 회수했다고 보도했다. 신화통신은 환경 보호, 토지 이용, 직원 보건, 생산 안전, 소방, 납세, 상품 품질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문제가 발견됐다고 했다.
이날 저녁 대만 업무를 담당하는 중국 국무원 대만판공실의 주펑롄(朱鳳蓮) 대변인은 위안둥그룹 조사가 대만 독립 저지와 관련됐느냐는 질문에 대해 신화통신 보도 내용을 언급했다. 이어 “(대만 독립 세력과 관련된) 기업, 자금 후원자는 반드시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한다”며 “우리는 대만 기업이 대륙에 투자하는 것을 환영하고 기업의 합법 권익을 보호하겠지만 절대로 대만 독립을 지지하며 양안(중국과 대만) 관계를 파괴하는 이가 대륙에서 돈을 버는 것, 밥만 먹고 솥을 깨는 일(吃飯砸鍋)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또 “대만 기업인과 기업들은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고, 대만 독립 분열 세력과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한다”고 했다. 중국 당국은 차이잉원 총통이 이끄는 대만 민진당 정부를 대만 독립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중국 관영 환구시보는 대만 정부의 발표를 인용, 위안둥그룹이 2020년 대만 의회 선거에서 민진당 후보 47명에게 5800만대만달러(약 25억원)를 기부했다고 보도했다.
위안둥그룹은 1937년 상하이에서 설립돼 1949년 대만으로 이전했다. 석유화학, 방직섬유, 시멘트를 주력으로 통신업, 해운업을 하고 있으며 연 매출은 7200억대만달러(약 31조원·2018년 기준)다. 중국에도 대규모로 투자해 그룹 홈페이지에 따르면 100개 가까운 그룹사 가운데 28개가 중국 본토에 있다.
위안둥그룹은 이날 “2분기 중국 당국에서 총 8862만위안(약 165억원)의 벌금 처분을 받았으나 경영에는 지장이 없다”는 입장만 밝혔다. 대만상공회의소도 “개별 사안”이라며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대만 언론은 “위안둥그룹은 민진당 후보뿐만 아니라 국민당 후보 14명에게도 기부했다”면서도 “위안둥그룹이 최근 나빠진 양안 관계의 제물이 됐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리더웨이(李德維) 국민당 의원은 대만 연합보에 “중국 당국은 위법 사실이 있으면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며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여야 하며 다른 요소의 가능성을 개입시켜선 안 된다”고 했다.
과거 중국 당국은 대만 기업의 투자를 받으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왔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1999년 대만과 가까운 푸젠성 성장 대리로 승진한 직후 대만 기업인들에게 “양안 관계에서 어떤 일이 발생해도 성 정부는 법에 따라 대만 기업의 정당한 이익을 보호할 것”이라고 했다. 리덩후이 당시 대만 총통이 중국과 대만을 ‘국가 대 국가’ 관계로 봐야 한다는 양국론(兩國論)을 주장해 중국에 투자한 대만 기업인들의 우려가 크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중국 국력이 커지면서 중국 당국은 대만 등 핵심 이익, 자국의 발전 이익을 강조하고 이를 거스른 외국 기업에 대한 불매 운동을 조장하고 각종 명목으로 괴롭히고 있다. 2016년 한미 정부의 합의로 롯데그룹의 경북 성주 골프장에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를 배치하기로 하자 중국이 이에 반발, 롯데 계열사에 보복 조치를 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시만 해도 중국 정부는 겉으로는 건축 허가, 위생 문제, 자발적 불매 운동 등의 이유를 댔지만 이번 위안둥그룹의 사례를 보듯 앞으론 정치적 이유를 앞세울 가능성도 있다. 중국에 투자한 외국 기업에 ‘대만 독립 반대’ 입장을 밝히라거나 미국 주도의 공급망 동맹에 불참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중국에 투자한 한 기업인은 “과거 중국 공산당 간부들에게는 투자 유치가 최우선 과제였지만 이제는 돈을 좀 손해 보더라도 핵심 이익을 선명히 밝히는 게 중요해진 것 같다”며 “반도체 등을 둘러싸고 미·중이 본격적으로 경쟁할 경우 중국이 자신의 ‘발전 이익’을 앞세워 미국에 협조적인 외국 기업에 대해 직간접적인 제재를 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