блуди(블루지)와 блужда(블루쥐다). 비슷한 의미를 가진 두 러시아어 단어에는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 ‘방탕하게 행동하다’ ‘문란하다’ 뜻으로 윤리적으로 질책과 비난의 시선이 담겨있는 반면, 후자에는 ‘헤매다’ ‘방황하다’는 의미로, 공감과 연민의 시선이 깔려있다. 어느 언어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유엔 공식 언어 중 하나인 러시아어 역시 파면 파고들수록 미묘한 차이를 가진 의미 때문에 학습욕과 혼란을 동시에 불러온다는 평가가 없지 않다. 이렇게 비슷비슷해보이는 러시아어 어휘들이 가진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고 용례를 정리한 사전이 만들어져 종이 사전으로 출판됐고, 대형 포털에도 탑재될 전망이다.

유학수 교수가(가운데)가 러시아 이르쿠츠크 국립대에서 제자들과 찍은 사진. /유학수 교수 제공

유학수 선문대 아시아문화학부 유라시아전공 교수와 재한 러시아 번역가 장 디아나씨가 공저한 ‘러한 유의어 학습사전’이다. 인터넷 번역기와 인공지능 서비스가 장악한 시대에 모처럼 나온 ‘새 종이 사전’이다. 저자 유학수 교수는 본지 통화에서 “러시아어는 영어·프랑스어·독일어와 비교했을 때 유의어의 비중이 두드러진 언어”라며 “학생과 현지 유학생, 그리고 교수로 40년동안 러시아어와 인연을 맺고 있는 입장에서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우리말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돼요. 비슷비슷한 감정이지만 ‘슬픔’·‘우울함’·‘서글픔’·‘통탄스러움’·‘비통함’ 같은 단어들에 깃든 의미는 조금씩 다르잖아요. 그런 단어들을 추려내 의미의 차이를 설명하느라 정말 원어민 공저자와 머리를 쥐어짰습니다.(웃음)”

그렇게 추려내 사전에 수록된 유의어를 보면 вафельница(바펠니짜·와플 굽는 기계)- вафельщица(바펠쉬짜·와플을 만드는 사람), виноватый(비나바띄·죄책감을 느끼는)- виновный(비노브늬·잘못한), дипломатический(지쁠라마찌췌스키·외교적인)-дипломатичный(지쁠라마찌취늬·능수능란한) 등의 사례가 있다. 이렇게 러시아어 특유의 유의어적 요소를 이해하면 레프 톨스토이·알렉산드르 푸시킨·안톤 체호프 등 러시아 출신 문호들의 작품을 접할 때, 처음 느낄 수도 있는 거리감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유 교수는 말했다. 집필 과정만 5년이 걸린 이번 사전은 최종 교정 단계에서는 챗 GPT 4.0의 도움을 받았고, 수록된 콘텐츠는 네이버 러시아어 사전에도 이르면 올 연말쯤 탑재될 예정이다.

러한 유의어 학습사전 표지

한국외대 노어과 86학번인 그는 대학생 때 냉전 체제가 해체되고 한국이 북방외교의 물꼬를 트며 러시아(당시 소련)와 공식 관계를 맺는 상황을 지켜봤다. 당시만 해도 적성국의 언어였던 러시아어 전공을 지망했던 배경을 묻자 그는 고교 교장선생님을 소환했다. “고교(여의도고) 2학년때 교지 편집진으로 교장선생님을 인터뷰했어요. 김재규 선생님이라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훗날 행정고시에 합격해 여의도고·경동고·현대고 교장을 하신 입지전적인 교육자세요. ‘고3 선배들에게 어떤 전공을 추천하시겠냐’고 물었더니 바로 ‘소련어(러시아어)’라고 대답하신 거예요. 당시 김재규 교장은 “한반도를 둘러싼 4강을 보라. 지금 바람이 불지 않는 언어는 소련어밖에 없지 않느냐”고 했고, 이 말은 새긴 유 교수는 러시아어학도가 됐다.

소련 해체 후 첫 러시아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 집권기였던 1993년에 유학을 했고, 2000년부터 선문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경색된 한국과 러시아 관계에 대해 유 교수는 “학부 때부터 러시아어를 배웠고 러시아에서 유학했다는 개인적 배경이 있지만 학자로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러시아를 이해하려고 하고 있다”면서 “러시아의 현 정권과 보통의 러시아인들을 동일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