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사람들의 일상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린다.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으로 가자지구 접경 이스라엘 영토의 주민들도 한순간에 삶을 빼앗겼다. 당시 하마스의 공격으로 1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250여 명이 인질로 끌려갔다. 그중엔 지역 농구팀 선수로 뛰던 고등학생 오피르 앵겔(18)도 있었다.

지옥같았던 날들을 증언하다 - 11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이스라엘인 오피르 앵겔(18·오른쪽)이 부친과 함께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 7일 가자지구 인근 이스라엘 영토에서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에 납치됐다가 지난해 11월 일시 휴전을 통해 풀려났다. /고운호 기자

여자 친구의 아버지와 가자지구로 끌려갔던 그는 지난해 11월 일시 휴전 때 가까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 장애인 복지협회 샬바와 한국의 송도주사랑교회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 그는 11일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본지와 만나 상황을 증언했다.

“보통 집마다 미사일 공격에 대비해 두꺼운 콘크리트로 만든 ‘안전방’이 있어요. 언제나 그랬듯 안전방으로 들어갔어요.” 미사일 공습을 피하고 나면 곧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날은 여느 때와 달랐다. 포격과 굉음이 잦아들지 않는 가운데, 또래들의 왓츠앱 메신저 단톡방에 속속 글들이 올라왔다. ‘집이 불타고 있어’ ‘우리 엄마가 총에 맞았어’. 이스라엘 주민들은 무방비였다.

앵겔은 여자친구 및 그녀의 가족들과 여섯 시간을 ‘안전방’에 숨어 있었지만, 하마스 대원들은 결국 들이닥쳤다. 평소 사람만 보면 짖던 반려견 ‘초코’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마스 대원 중 하나가 강아지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아수라장 속에 납치됐다. “하마스는 우리 국기를 불태우면서 외쳤어요. ‘이스라엘은 끝났다. 팔레스타인이여 영원하라’라고.”

그는 여자친구의 아버지 및 다른 이스라엘 소년과 ‘인질 조’가 됐다. 두 손을 포박당하고 끌려간 곳은 한 아파트였다. 하마스 대원은 자기 동네의 이웃·친지들을 데려와 인질들을 보여주며 웃고 떠들었다. “그때 알았어요. 내가 지금 전리품 신세가 됐다는 걸. 동물원의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었죠.” 24시간 감시를 받으며 딱딱한 매트리스에서 잠을 잤고, 작은 빵 조각으로 연명했다. 하마스 대원들의 ‘정신적 괴롭힘’도 반복적으로 가해졌다. “우리에게 되풀이해 말했어요. 너희는 다시 못 돌아갈 거라고. 이스라엘 정부도 가족들도 너희에게 관심이 없다고요.”

처음 갇힌 곳에서 26일간 머물다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역시 일반 주택처럼 보였다. 그곳에 살던 하마스 대원은 매일같이 한 살 정도 돼 보이는 어린 딸을 데리고 와 인질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주입 교육’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하마스의 강요로 동영상도 촬영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와 ‘도저히 끔찍해서 더 못 버티겠다’는 상반된 내용의 대본이 제시됐고, 각각의 버전으로 녹화했다. “협상에 이용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녹화 다음 날 하마스 대원은 펜과 종이를 가져오더니 “너희는 곧 죽을 것이니 가족들에게 보낼 유서를 쓰라”고 했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온몸에 힘이 풀렸다고 했다. 하지만 소년 인질들은 인질 석방 협상을 거쳐 팔레스타인 적신월사를 통해 이스라엘군에 인계됐고, 가족 품에 안겼다. 지난해 11월 양측이 일시 휴전하고 노약자·미성년 중심의 이스라엘 인질과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을 맞교환할 때 명단에 포함된 것이다. 끌려간 지 54일 만이었다. 하지만 함께 끌려갔던 여자 친구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올해 초 이스라엘 정보 당국은 여자 친구 아버지의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지금도 카메라 앞에 설 때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고 했다. 하마스의 강요로 동영상을 촬영할 때 트라우마 탓이다. “나는 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곳 생활이 어떤지 알아요. 남아 있는 분들은 더 끔찍한 상황을 겪고 있을 거예요. 이들이 모두 돌아갈 수 있도록 한국에서도 많이 기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