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혜화동 경신고등학교 본관 앞에는 학교 설립자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가 머리를 땋은 어린 소년의 손을 잡고 있는 동상이 서 있다. 이 소년의 모델은 독립운동가 우사(尤史) 김규식(1881~1950). 언더우드가 김규식과 또래 아이들을 모아 1885년 서구식 교육을 시작한게 경신고의 모태이다.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열 일곱살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 학부를 졸업하고 프린스턴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국제 정세에 일찍 눈을 뜬 그는 귀국해 경신학교·연희전문 등에서 인재를 기르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총장으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그는 광복 후 남북이 분단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지만 6·25 때 북한에 납치돼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 김규식이 120년 세월을 건너뛰어 까마득한 후배들과 만났다.

미국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 학생과 교수로 구성된 답사단이 1일 학교 선배 김규식이 교사로 근무했던 서울 경신고 교정을 찾아 언더우드와 김규식을 모델로 한 동상 앞에서 셀카를 찍고 있다. /김지호 기자

지난 1일 로어노크대 학생 6명(엘리자베스 월튼·캐머런 맥도널드·오웬 콜랜더·제이크 스트롤·루이스 에드워즈·애슈턴 하워드)과 교수 2명(스텔라 슈·휘트니 레슨)이 경신고를 찾았다. 이들은 아시아 관련 학과를 개설한 북미지역 대학들의 협력체인 아시아네트워크의 후원 프로그램으로 3주 간 한국을 답사 중인데, 이날 ‘대선배’의 자취가 있는 경신고를 찾은 것이다. 한지민 경신고 교장·길덕호 경신중 교장·서원석 학교법인 경신학원 부이사장 등 학교 관계자들과 우사의 손녀인 김수옥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이 일행을 반겼다. 학생들은 김규식과 언더우드 동상, 김규식이 납북돼 북한에서 세상을 떠나기 직전 통일을 갈망하며 남긴 어록이 새겨진 비석 앞, 138년 학교 역사를 담은 역사관을 차례로 견학했다.

3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중인 로어노크대 답사단이 우사 김규식이 교사로 근무한 서울 경신고를 찾아 김규식과 언더우드를 모델로 만든 동상 앞에 섰다. /김지호 기자

앞서 이들은 미국 선교사들이 싹을 틔워 한국을 대표하는 교육·종교 기관으로 성장한 연세대와 이화여대, 새문안교회도 방문했다. 올해 동맹 70주년을 맞이한 한·미 양국 관계가 사실은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각별했다는 걸 확인하는 현장 수업이었다. 요즘 미국 젊은이에게 한국은 ‘K팝과 드라마의 나라’로 각인돼있는게 사실. 학생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이그룹 갓세븐과 몬스터엑스의 팬이라는 애슈턴 하워드(정치학과 3학년)는 “한국의 역사에 대해 더 궁금한게 많아져, 내년에 다시 새로운 주제로 학술 답사를 오고 싶다”고 말했다. 오웬 콜랜더(역사학과 졸업예정)는 “한국 답사를 오기 전에 김규식의 삶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했고, 격동의 시대를 살아갔던 분이 내 대학선배라는 점이 대단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우사 김규식의 손녀인 김수옥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가운데)도 할아버지의 까마득한 후배들과 만났다. /독자 제공

로어노크대 역시 한국과 인연이 각별하다. 루터교 계열 대학으로 1842년 개교한 이 학교는 설립 초기부터 원주민과 라틴계·아시아계 등 외국인들에게 폭넓게 문호를 개방해왔다. 특히 지난해에는 로어노크대 캠퍼스에 김규식이 이곳에서 공부한 동문임을 알려주는 버지니아주 공식 역사표지판도 세워졌다. 버지니아주는 1927년부터 주의 역사에 의미 있는 행적을 남긴 인물이나 사건의 자취가 깃든 곳에 기념 표지판을 세워 관광·교육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해 버지니아주 세일럼 로어노크대 교정에 세워진 역사 표지판. 김규식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기술돼있다. /로어노크대

표지판에는 그가 임정 부주석을 지냈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국제사회에 독립을 호소하고, 광복 후에는 남북 분단 반대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6·25전쟁 때 납북돼 생을 마친 일생도 소개됐다. 독립운동가의 생애가 버지니아주 역사의 한 장(章)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이번 답사를 인솔한 스텔라 슈 역사학과 교수와 휘트니 레슨 교수는 “189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우리 학교를 거쳐간 한국 학생은 34명으로 양국 관계의 초석을 다졌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