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 달이 지난 가운데 우크라이나군이 수도 키이우(키예프) 인근 전선(戰線)에서 러시아군에 점령됐던 지역을 잇따라 탈환하며 전세를 뒤집는 상황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될 경우 러시아군이 키이우 점령에 최종 실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리더십도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23일(현지 시각) 영국 국방부를 인용해 “우크라이나군이 수도 키이우로 향하는 핵심 관문 도시인 마카리우와 모스천을 잇따라 되찾았다”고 말했다. 마카리우와 모스천은 키이우 도심에서 서쪽과 북서쪽으로 각각 50㎞, 25㎞ 떨어진 요충지다. 우크라이나군은 키이우로 향하는 고속도로 통제권까지 확보하면서 키이우 방어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주력 병력이 빠르게 진격했던 이르핀 지역도 우크라이나군이 대부분 되찾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르핀은 키이우에서 북서쪽으로 20㎞ 떨어진 지역이다. 비탈리 클리치코 키이우 시장은 23일 “우리 군이 오늘 이르핀의 거의 모든 마을을 탈환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군이 키이우 서쪽과 북서쪽의 여러 핵심 지역을 탈환함에 따라 이르핀·부차·호스토멜 등 키이우 가까운 곳까지 진주했던 러시아군이 오히려 포위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영국 국방부는 “러시아가 보급 부족과 사기 저하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우크라이나군이 키이우 외곽 지역을 되찾으면서 러시아 부대를 포위할 기회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키이우 서쪽뿐만 아니라 동쪽 전선에서도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이 성공을 거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이날 CNN에 “러시아군이 키이우 도심으로부터 동쪽으로 55㎞ 떨어진 지역까지 퇴각했다”며 “이는 전날보다 25~35㎞나 밀려난 것”이라고 했다. 일부 러시아군은 공세를 포기하고 방어 태세로 전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ABC 방송은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몇 주 동안 전진한 거리의 두 배 이상 후퇴했다”며 “이는 일부 지역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 점령지 수복에 나섰다는 신호”라고 말했다.
당초 러시아는 지난달 24일 전면 침공 후 속전속결로 우크라이나의 항복을 받아낼 계획이었다. 개전 초만 해도 압도적 전력 차를 앞세워 목표 달성의 기대감을 높였지만, 지형지물에 익숙한 우크라이나군의 격렬한 저항에 막혀 전황은 교착 상태다. 장성을 포함한 고위 지휘관 최소 15명이 우크라이나 저격수 등에 의해 제거된 것도 예상치 못한 타격이 됐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다 손실이다.
러시아군의 병력 손실도 커지고 있다. AP통신은 이날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러시아군 사망자가 7000~1만5000명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수치(1만5000명)는 과거 소련 시절 벌였던 아프가니스탄 전쟁(1979~1989) 10년간 소련군 사망자 숫자와 맞먹는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더타임스는 이날 러시아군의 곤혹스러운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우크라이나 보안 당국의 감청 내용을 소개했다. 우크라이나 보안국이 남부 요충지 미콜라이우 인근에 주둔 중인 러시아군 교신을 감청한 결과 러시아 전투기는 아군을 향해 폭탄을 투하하기도 했고, 부대 병력 절반은 동상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상황을 보고한 장교는 “1990년대 체첸 전쟁 때보다 러시아군 상황이 훨씬 나쁘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 중 가장 먼저 러시아군에 점령됐던 남부 도시 헤르손에선 러시아가 헬기를 철수한 사실이 인공위성 영상으로 확인됐다. 우크라이나군은 최근 헤르손 공항을 공격해 러시아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우크라이나 남동부 마리우폴 근처 베르단스크 항구에서는 보급품을 전달하려고 정박해 있던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대형 상륙선 오르스크가 우크라이나군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반면 러시아가 전열을 정비해 반격에 나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러시아 국방부는 24일 “키이우 외곽 남쪽 다닐로프카에 배치된 우크라이나의 방공 시스템을 파괴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