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아르헨티나’
두 나라가 나란히 언급되면 축구 강국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다. 실제로 양국은 지난 22일 발표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에서 나란히 1·2위를 차지하며 2025년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올해 두 나라가 존재감을 드러낸 무대는 축구장뿐만이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스페인과 아르헨티나의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각각 2.9%, 4.5%로 속한 대륙 내 주요국들과 비교해 가장 돋보이는 경제 성장을 거둘 것으로 전망된다. 축구장에서의 성적을 국제 경제 무대로 그대로 옮겨온 셈이다.
그렇다면 이 국가들은 어떤 선택과 전략으로 환골탈태에 성공했을까. 또한 올 한 해 글로벌 경제를 강타한 이슈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WEEKLY BIZ가 2025년 다뤘던 주요 주제와 인터뷰했던 인물들의 발언을 중심으로 올 한 해 글로벌 경제를 돌아봤다.
◇경제로 옮겨간 피파랭킹
스페인이 10여 년 전 재정 위기를 겪으며 ‘남유럽의 문제아’로 불리던 시절은 이제 옛말이 됐다. 스페인은 유럽 전역이 겪고 있는 노동력 부족과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 이민 문턱을 낮추는 등 유연한 노동 정책을 추진하며 체질을 바꿨다. 실업률은 2013년 26.1%로 정점을 찍은 뒤 올해는 10.4%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뿐 아니다. 코로나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관광업에 더해 10여 년 전부터 시행한 디지털 전환 정책 등까지 결실을 맺으면서 2020년 10%에 육박하던 재정적자율도 올해 3%대로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의 개혁이 안정 궤도에 접어들었다면, 아르헨티나는 개혁을 통해 이제 막 반등 국면에 들어선 모습이다. 지난 10일 집권 만 2년을 맞은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공공 지출과 과도한 복지·보조금 등을 한꺼번에 잘라내겠다는 ‘전기톱 개혁’을 단행하며 고질적 문제이던 인플레이션을 빠르게 잡아가고 있다. 2023년엔 전월 대비 월간 물가 상승률이 25%에 달했지만, 올해는 2%대까지 잡혔다. 자유시장 원칙에 기반한 급격한 개혁 추진으로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1.3% 하락하고 빈곤율은 52.9%까지 오르는 등 부작용도 있었으나, 지난 3분기에는 빈곤율이 27.5%로 떨어졌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지난 10월 진행된 중간선거에서 밀레이가 이끄는 여당이 압승을 거두며 개혁 추진에 한층 탄력이 붙을 것이란 예상이다. 이에 IMF는 아르헨티나(올해 4.5% 예상)가 내년에도 4%대 성장을 지속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유럽연합(EU)을 이끄는 독일과 프랑스는 0%대 저성장이 예상된다. 특히 프랑스는 재정 위기 속에서 긴축 예산안을 추진하던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가 의회 불신임으로 실각하는 등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지며 신용 등급 강등이라는 수모를 겪었다. 아시아에서는 반도체 호황을 등에 업은 대만이 7%대 고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돼 주요국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둘 전망이다.
◇AI 거품론 속에도 랠리 이어져
인공지능(AI)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글로벌 경제를 관통하는 메가 트렌드였다. 기대와 논란이 교차하는 가운데서도 AI 관련 기업들의 주가는 고공 행진을 이어갔다. AI 수요 폭증에 따른 반도체 호황으로 엔비디아의 주가는 지난 24일 기준 연초 대비 36.4% 상승하며 세계 시가총액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제미나이3’와 이미지 생성 AI ‘나노 바나나’를 잇따라 선보인 구글은 같은 기간 65.8% 올랐고, 마이크로소프트(16.6%)와 브로드컴(51%), 오라클(18.9%), AMD(78.3%), 마이크론(228.3%)도 눈에 띄는 주가 성적을 거뒀다.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종합지수도 연초 대비 22.5% 오르며 상승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 같은 성과는 하반기 들어 ‘AI 거품론’이 확산한 가운데 나왔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지난 3분기에는 AI 빅테크인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메타의 매출이 각각 전년 동기 대비 16%, 18%, 13%, 26% 증가하며 거품론은 일단 진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이 기업들의 투자 확대 흐름 역시 이어질 것으로 보여 AI 거품 논쟁도 지속될 것이란 관측이다. 실제로 올해 네 기업의 자본 지출은 총 4000억달러에 이르고, 내년엔 4200억달러를 넘어설 것이란 게 블룸버그 전망이다. 그럼에도 세계 2대 사모펀드인 EQT의 페르 프란젠 CEO는 “AI 거품이 터지는 것보다 AI 붐에 올라타지 못하는 게 더 큰 리스크”라고 했다.
AI 거품론이 고개를 드는 또 다른 이유는 이렇게 투자한 그래픽처리장치(GPU)·데이터센터 등 인프라의 빠른 감가상각 때문이다. 반면 AI 발전을 떠받치는 또 다른 축인 데이터는 시간이 지날수록 감가되지 않고 오히려 축적될수록 가치가 커진다. 대형 언어 모델(LLM)이 앞으로 학습할 공개 데이터가 부족해지는 ‘데이터 절벽’ 현상 우려가 커지면서, 양질의 데이터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AI 업계의 또 다른 승부처로 떠올랐다.
◇트럼프 관세, 기술 굴기로 맞선 中
AI와 함께 ‘도널드 트럼프’와 ‘관세’는 연초부터 올 한 해 글로벌 경제를 뒤흔든 핵심 키워드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미국·멕시코·캐나다 무역협정(USMCA)으로 묶인 캐나다와 멕시코에 펜타닐 유입과 불법 이민 문제를 이유로 징벌적 관세 25%를 부과하더니 이후 관세 유예와 세율 조정을 반복했다. 이처럼 각국에 대한 관세 부과 대상과 세율이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바람에 각국 정부와 기업, 개인 투자자에 이르기까지 매일같이 백악관 홈페이지와 트럼프의 트루스소셜 계정을 드나들며 변경된 정책을 모니터링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달 기준 추가 관세율은 동맹인 한국·일본·유럽연합(EU) 등에 15%, 트럼프와 대립각을 세운 브라질엔 50%가 부과된 상태다. ‘관세 전쟁’의 핵심 타깃인 중국엔 한때 100%가 넘는 추가 관세를 매기고 고성능 반도체 등에 대한 수출 통제를 가했다. 그러다 지난 10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부산에서 미·중 정상회담이 열리며 징벌적 관세를 1년 유예하면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트럼프의 관세 전쟁은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유예일 뿐 관세 문제는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글로벌 경제의 ‘시한폭탄’으로 남아 있다.
트럼프가 촉발한 관세 전쟁과 수출 통제에 대한 중국의 대답은 ‘기술 굴기(崛起)’였다. 저비용·고성능 AI 모델로 세계를 놀라게 한 딥시크가 대표적이다. 이에 더해 중국이 2015년 발표한 제조업 강국 도약 전략인 ‘메이드 인 차이나 2025(MIC 2025)’도 상당 부분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계획은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을 목표로 10개 핵심 산업을 육성하는 국가 전략으로,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이 이들 분야에서 목표의 대부분을 달성했다고 전했다. 특히 전기차와 배터리, 태양광 발전 등 일부 분야에서는 독과점적 지위를 확보한 상태다.
◇부채 폭탄 키우는 세계
전 세계 주요국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빚 잔치’를 벌이면서 부채 규모는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말 기준 전 세계 부채 규모는 346조달러(약 50경원)로 2년 새 약 10% 증가했다. 이에 대해 카르멘 라인하트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석좌교수는 “지정학적 갈등에 안보 부담은 커지고, AI 개발 경쟁과 무역 불확실성까지 겹치다 보니 나랏돈을 ‘더 쓰자’가 당연한 선택지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라고 진단했다.
빚의 절대적 규모뿐만 아니라 건전성 측면에서도 악화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선진국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이 2005년 76.2%에서 올해 110.1%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유럽의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우고 파니자 부회장은 “문제는 최근 선진국들의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있는데 각국이 저마다의 이유로 부채를 늘리고 있는 점”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세계 경제를 이끄는 미국의 부채 증가 속도가 두드러진다. 지난 25일 기준 미국의 부채는 38조3753억달러로 5년 새 약 40% 늘었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국제경제학 교수는 “향후 4~5년 안에 미국이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며 “극단적인 경우 부분적 디폴트(채무 불이행)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레이 달리오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설립자는 “미국의 국가 부채 증가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달러 위상을 흔들어) 세계 자본시장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유럽 최대 경제국인 독일도 신규 부채가 GDP의 0.35%를 넘지 않도록 제한하던 기본법(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부채를 늘리는 등 유럽에서도 줄줄이 부채 증액에 나섰다. 반면 대만은 경제 성장뿐 아니라 부채 관리 측면에서도 ‘올해의 모범생’으로 꼽혔다. 2012년 39.2%이던 정부 부채 비율은 지속 감소해 지난해 26.3%로 줄었고, 올해는 23.4%까지 떨어질 전망이다.
◇희비 갈린 안전 자산
수십 년간 대표적 글로벌 안전 자산으로 군림해 온 미국 달러와 금의 희비는 올해 명확히 엇갈렸다. 주요국 통화 대비 미 달러의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인덱스’는 연초 109.25로 시작했지만 지난 24일 97.95를 기록하며 10%가량 하락했다. 달러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트럼프가 취임한 연초만 해도 ‘강한 미국’에 대한 기대 속에 이른바 ‘킹달러’가 위용을 드러내는 듯했다. 하지만 무차별 관세 예고가 오히려 글로벌 교역 위축과 미국 기업의 비용 증가에 대한 우려로 이어지며 달러에 대한 신뢰를 흔들었다. 실제 달러 인덱스는 관세 전쟁이 본격화한 지난 4월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100 선 아래에 머물렀다.
로고프 교수는 “계속 내려가는 달러의 위상은 트럼프의 재집권 이래 그 속도를 급격하게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통제 불능 수준으로 불어난 부채, 약해지는 연방준비제도의 독립성, 미국이 세계 각국과 벌이는 무역 분쟁 등으로 쇠락해 온 ‘팍스 달러(달러 패권)’ 시대가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더 빨리 무너질 가능성이 커졌다고 경고했다.
달러 약세는 금 가격 상승을 부채질했다. 미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인하 사이클 속에 금값은 연초 대비 69%가량 상승했다. 미국의 막대한 부채 증가로 미 국채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자 각국 중앙은행은 달러 대신 금 비중을 늘렸다. 여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이스라엘과 이란 간 무력 충돌 같은 지정학적 갈등이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며 안전 자산을 찾는 수요가 급증했다. 은의 상승세는 더욱 두드러졌다. 은값은 연초 대비 143% 상승했다. 금과 같은 이유로 글로벌 안전 자산으로 꼽히는 데다, 전자기기, 태양광 발전 설비 등 산업용 수요로 몸값이 더 뛰었다.
◇스테이블코인 웃고, 비트코인 울고
가상 화폐 등 디지털 자산 시장은 트럼프의 재집권에 기대가 컸다.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트럼프는 취임하자마자 대통령 직속 디지털 자산 시장 TF(태스크포스)를 설립했고, 비트코인을 국가 전략 자산으로 인정하고 장기 보유를 선언하는 행정명령에도 서명했다.
특히 날개를 단 것은 스테이블코인이었다. 달러 등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법정 화폐에 ‘1코인=1달러’처럼 가치가 연동되도록 설계된 스테이블코인은 발행·유통 등 규제 방안을 담은 이른바 ‘지니어스법(스테이블코인 혁신법)’이 통과되면서 제도권 금융의 울타리로 한 발짝 더 들어섰다. 이에 시장에 유통되고 있는 스테이블코인의 시가총액은 연초 대비 50% 이상 늘어 3086억달러(지난 24일 기준)를 기록했다. 스테이블코인 USDT의 발행사 테더의 파올로 아르도이노 CEO는 “처음엔 낯설었던 신용카드가 소문과 금융 교육을 거쳐 대중화됐듯, 스테이블코인도 차세대 금융 기술로서 같은 변화를 이끌 것”이라고 했다.
반면 비트코인 가격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지난 10월 역대 최고가인 12만6000달러까지 올랐다가, 30%가량을 반납해 연말 8만~9만달러를 오가며 연초 대비 마이너스 수익률을 보이고 있다. 미 정부가 전략 자산으로 사들일 것이란 기대와 달리 이미 압수된 코인을 보관하는 수준에 머무른 데다, 시장에 별다른 호재가 없었던 탓이다.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에 평균 4년마다 찾아오는 비트코인 반감기(채굴량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시기)에 가격이 급등한다는 ‘4년 주기설’이 유효한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펼쳐지기도 했다. 한편 민간에서는 디지털 자산을 회사의 전략 자산으로 포함하는 DAT(디지털 자산 재무 전략) 기업들이 다수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