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대만 고속철도 신주(新竹)역. 대만을 대표하는 ‘반도체 도시’ 신주 북동쪽에 위치한 이 역을 나서자, 고층 빌딩과 아파트들 사이로 곳곳에서 건물 공사가 한창이었다. 신주 북쪽 주베이(竹北) 지역, 특히 고속철도역 인근은 신주를 대표하는 ‘신흥 부촌’으로 떠오르고 있는 곳이다. 고급 신축 아파트 단지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고속철도를 타면 30~40분 만에 수도 타이베이에 도착할 수 있어 신주과학단지의 고소득 엔지니어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곳에서 ‘타이칭 부동산’을 운영하고 있는 류젠훙(劉建宏)씨는 “고속철도역 근처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었는데, 지금은 신주에서 가장 비싼 땅이 됐다”며 “최근 3년 새 집값이 거의 두 배로 뛰어 평균 시세가 평당 약 3800만원, 최고가 아파트는 약 45억원까지 올라 타이베이 외곽 수준에 근접했다”고 말했다.
신주과학단지는 대만의 반도체 산업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1980년대 초 정부가 ‘대만형 실리콘밸리’를 표방하며 조성했다. 대만의 경제적 번영을 상징하는 도시 신주는 수도권 밖의 최고 ‘부자 동네’로 꼽힌다. 특히 TSMC로 대표되는 대만 반도체·전자 기업 소속의 고소득 엔지니어들이 모여 사는 이곳의 가구당 평균 가처분 소득은 150만대만달러(약 7000만원)로 수도 타이베이(148만대만달러)를 제치고 대만 도시 중 1위다. 류씨는 “대만 고소득층은 자동차나 명품처럼 부를 과시하는 데 돈을 쓰는 대신, 주로 저축을 하거나 집을 사는 등 자산을 지키는 데 더욱 집중하는 편이다”고 했다.
사람뿐 아니라 대만 정부도 마찬가지로 ‘알뜰한 가계부’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대만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2010년 36.9%에서 올해 23.4%까지 떨어질 전망이다. 같은 기간 한국이 28.3%에서 53.4%로 급등한 것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WEEKLY BIZ는 반도체 호황기에 미래를 대비하는 대만의 전략을 들여다봤다.
◇막대한 세입에도 ‘부채 줄이기’ 올인
대만 정부는 지난달 28일 올해 대만의 실질 경제성장률이 7.37%에 이를 것이라고 발표했다. 트럼프발 관세 전쟁 등으로 촉발된 글로벌 경기 침체로 한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들이 1% 안팎의 성장에 그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대만 혼자서만 ‘나 홀로 질주’를 이어가는 셈이다. 이러한 고속 성장의 배경에는 전 세계적인 ‘인공지능(AI) 붐’이 있다. AI 반도체 수요 급증으로 대만의 전자 산업 수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가장 최근인 10월 데이터를 보면, 대만의 전체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49.7% 오른 618억달러(약 90조7000억원)를 기록하며 사상 최초로 월 600억달러 선을 돌파했다. 특히 AI 서버 수요가 급증해 정보통신 제품 수출이 138.2%, 반도체 등 전자 부품 수출이 29.2% 증가하며 전체 성장을 끌어올렸다. 올해 4분기 전체 상품 수출 증가율(전년 동기 대비) 역시 36.8%가 예상되는 등 AI 관련 제조업이 유례없는 ‘수출 잭팟’을 터뜨리고 있다.
자국 기업의 수출 실적 향상은 곧 정부 곳간을 채우는 세입 기반 확충을 의미한다. 세입이 늘어나면 정부는 복지 지출을 확대하며 재정을 키우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만 정부와 의회는 여전히 ‘짠물 예산’을 고수하며 확장적 재정 정책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대만 정부의 세출은 약 2조9200억대만달러(약 138조원)로, 지난해 약 2조8500억대만달러에 비해 불과 2.5% 정도만 증가했다. 지난 윤석열 정부가 “허리띠를 졸라맸다”고 강조한 한국의 올해 세출 증가율 3.2%보다 낮다. 기록적인 호황에도 대만 정부와 의회가 사실상 나라 살림 허리띠를 졸라맨 셈이다. 반면 세입은 3조1600억대만달러까지 늘어 기록적인 흑자 재정을 기록했다. 지난달 대만 정부가 한국의 ‘민생 회복 소비 쿠폰’과 성격이 유사한 ‘전 국민 1만대만달러(약 47만원) 지급’을 시작하자, 대만 역시 확장적 재정 정책을 펼치는 게 아닌가 하는 오해도 있다. 그러나 그 재원이 된 추가경정예산안은 남는 세입을 재원으로 썼기 때문에, 재정적인 타격이 사실상 전무하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지독한 건전 재정 기조 덕분에,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씀씀이를 감당하기 위해 국채를 불가피하게 찍어내는 일도 대만에는 드물다. 대만의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2012년 39.2%를 정점으로 매년 감소 중이다. 발행도 대부분 기존 부채 상환을 위한 최소한의 규모로 제한돼 있다. 특히 반도체 사이클의 상승이 최고조에 달한 올해는 역대 최대인 1415억대만달러를 상환에 쏟아부어, 새로 빌리는 돈보다 갚는 돈이 더 많은 ‘부채 순감’ 구조를 만들며 빚의 절대 규모 자체를 줄였다. 2019년까지는 꾸준히 40% 미만으로 부채 비율을 유지하던 한국이 이후 매년 부채 비율이 꾸준히 오르는 것과 정반대되는 상황이다. 전 세계 주요국 중 이처럼 단기간에 부채 비율을 극적으로 낮춘 사례는 대만이 사실상 유일하다.
◇30년째 “자손에 부채 떠넘기지 말자”
대만은 국가 부채가 폭등하지 못하도록 ‘공공채무법’에 강력한 제동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국가 채무 규모에는 GDP의 40.6%라는 상한선이 설정됐고, 당해 연도 세수 총액의 5% 이상을 반드시 국채를 갚는 데 배정하도록 강제됐다. 채무 상한선을 정한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세수 일부를 반드시 국채 상환에 투입하도록 법으로 못 박은 사례는 매우 드물다. 1996년 법률 제정 당시 이 같은 조항을 넣은 입법 취지를 보면 “원금 상환의 정신을 실천해 채무 누적을 줄이고, 빚을 자손에게 떠넘기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대만은 왜 이렇게 부채 관리에 철저할까. 전문가들은 대만의 불안정한 대외적 상황을 핵심 이유로 꼽는다. 대만인이자 대만 시장 전문가인 왕수봉 아주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만은 (중국의 반대로) IMF에 가입할 수 없는 등 대외적으로 독립 국가로 완전히 인정받지 못한 상황”이라며 “금융 위기가 발생한다면 국제적으로 고립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재정을 보수적으로 운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어 “대중(對中) 안보 및 외교 이슈 때문에 재정과 부채 확대의 긍정적 효과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더 크게 보는 경향이 강하고, 정치권에서도 포퓰리즘적 재정 확대 정책을 주장하는 게 오히려 리스크가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대만 특유의 문화도 한몫한다는 평가도 있다. 쳰린루 국립타이베이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만은 양당(민주진보당·국민당) 모두 전반적으로 부채를 늘리는 것을 선호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부 부채 비율을 낮추는 것을 행정적 효율성과 재정 통제 능력의 척도로 간주한다”며 “무엇보다 대만 경제는 철저한 수출 주도형 구조이기 때문에, 빚을 내서 돈을 푸는 내수 부양 중심의 정책이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기업들은 ‘초격차’ 위해 대규모 투자
유례없는 호황에도 ‘돈잔치’ 대신 미래를 대비하는 데 투자하는 건 대만 정부뿐만이 아니다. 대만 반도체 등 전자 기업들 역시 설비 증설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 자료에 따르면 올해 대만 기업들의 1~3분기 반도체 장비 투자액은 약 240억달러를 기록, 지난해 동기(109억달러)보다 120%나 증가했다. 고대역폭 메모리(HBM) 반도체 호황으로 대만과 함께 반도체 상승 사이클에 진입한 한국의 반도체 장비 투자액은 같은 기간 187억달러를 기록, 지난해 동기(142억달러)보다 32% 늘리는 데 그쳤다.
TSMC는 올해 역대 최대 규모인 400억~420억달러(약 59조~62조원)의 자본 지출(Capex)을 기록했다. 호황기·불황기 가리지 않는 꾸준한 자본 지출 투자를 통해 기술 초격차를 유지하는 것이 TSMC의 기조인데, 지난해 280억~320억달러보다 약 100억달러가량 더 투자하며 기록적인 설비 투자를 단행했다. 지난달 25일에는 올해 하반기 양산에 돌입한 최첨단 2나노 공장을 기존 7곳에서 10곳으로 확대할 계획이라는 현지 보도도 나왔다. 황런자오 TSMC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올해 자본 지출의 약 70%는 첨단 공정 기술에, 10~20%는 특수 공정 기술에, 10%는 첨단 후공정과 기타 프로젝트 등에 사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즉, 반도체 호황으로 번 돈을 기술 초격차 유지에 재투자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다만 대만의 사례를 한국에 무작정 대입하긴 쉽지 않다는 전문가 평가도 나온다. 대만의 극단적인 부채 축소 기조는 대만의 정치·경제·문화적 특수성이 만든 독특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국제 사회에서 온전히 주권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외교적 제약 속에서 ‘재정 불안’ 자체가 국가 생존과 직결되는 만큼, 대만의 건전 재정은 일종의 고육지책에 가까울 수 있다. 여기에 사회적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합의가 강한 점, AI 수요 폭증이라는 시대적 행운까지 겹친 점도 대만의 예외성을 설명한다. 한국은 중부담·중복지 구조를 갖고 있고, 대만보다 훨씬 높은 신용도로 국채 발행이 가능한 만큼 동일한 모델을 그대로 이식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럼에도 왕 교수는 “호황기에 번 돈으로 빚을 줄인다”는 대만의 가장 기본적인 재정 원칙만큼은 한국 재정 당국이 뼈아프게 참고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한다. 만성적 적자에 익숙해진 한국 재정 운용이 한 번쯤 돌아봐야 할 대목이라는 것이다.
기업들의 과감한 설비 투자의 경우도, 한국과 대만의 사업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TSMC 같은 파운드리(위탁 생산) 기업은 첨단 미세 공정과 수율을 무기로 사실상 시장을 독점하며, 생산비 상승분을 고객에게 전가할 수 있는 가격 결정력을 가진다. 반면 한국의 주력 산업인 메모리 반도체는 표준화된 범용 제품이 대량 생산되는 시장으로, 투자보다는 비용 절감으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파운드리는 기술 로드맵 중심이라 경기 사이클에 비교적 영향을 덜 받지만, 메모리 사업은 경기 사이클에 직격탄을 맞기 때문에 사이클 상승 국면에서 마냥 자본 지출을 확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메모리 반도체 산업 역시 AI 전용 메모리인 HBM 경쟁 국면으로 접어든 만큼, 대만 TSMC의 사례처럼 과감한 설비 투자를 통해 어렵게 점한 우위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성수 연세대 경영전문대학원 겸임교수는 “HBM은 일반적인 D램 메모리 반도체에 비해 기술적인 난이도가 차원이 다르게 높기 때문에, 신기술 ‘퀀텀 점프’를 반복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파운드리 산업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자본이 투입돼야 한다”며 “한국도 지금껏 꾸준히 설비 자본 지출을 해오기는 했지만, 기존 메모리 반도체의 레드 오션 시장에서 나타나는 원가 절감 싸움과는 차원이 다른 ‘투자 스케일’ 경쟁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반도체 사이클이나 한국 경제의 특성상 자본 지출을 더욱 신중히 해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불황기 선행 투자가 장기적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왕 교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TSMC 역시 큰 타격을 입어 설비 투자를 줄였지만, 2009년 6월 은퇴했던 TSMC 창업자 모리스 창이 다시 CEO로 복귀하며 설비 선행 투자 기조로 전환한 사례가 있다”며 “2009년 연간 자본 지출은 약 27억달러로 전년(약 19억달러) 대비 이미 40% 넘게 늘어난 상태였던 데다, 이듬해인 2010년엔 ‘금융 위기 직후 투자 규모를 공격적으로 키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사들의 강력한 반발까지 있었지만 두 배가 넘는 60억달러 수준으로 투자를 확대했다”고 설명했다. 불황기 선행 투자로 확보한 첨단 공정 역량이 이후 대형 고객사 수주와 높은 수율로 이어지며 ‘선순환의 씨앗’이 됐다는 주장이 대만에서는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김 교수는 “현재 AI 반도체 공급망에서 한국 기업들이 엔비디아·TSMC가 만든 기술 표준에 HBM 메모리 반도체를 단순 납품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고, 이 때문에 공급망에서 종속도가 굉장히 큰 상황”이라며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에만 집중하고 파운드리를 접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지만, 이 같은 상황을 전략적으로 극복하려면 파운드리에 대한 자본 투자 역시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