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의균

“우리는 규칙 없는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직접 목격하고 있습니다. 강대국이 와서 ‘3000억달러를 투자해라. 그렇지 않으면 관세를 매기고, 안보 보장도 철회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규칙에 기반한 무역 체제’를 버리고 힘의 논리가 이끄는 세상으로 가는 건 큰 실수입니다.”

다자 무역 체제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로버트 스테이거 미국 다트머스대 교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 관세 발표와 잇따른 양자 협상을 두고 이처럼 우려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사실상 WTO 체제와의 종언을 고한 상태다.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달 7일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WTO가 주도하는 현재의 이름 없는 세계 질서는 유지할 수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고 했다. 브레턴우즈 체제 50년과 현재의 WTO 체제 30년 등 80년 동안 이어져 온 자유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해석이다.

그래픽=김의균

하지만 스테이거 교수는 규칙에 기반한 기존 무역 시스템을 개혁한다면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시각이다. 한국국제통상학회 하계 학술대회 참석차 방한한 그는 최근 서울 무역안보관리원에서 가진 WEEKLY BIZ 인터뷰에서 “지난 80년 동안 세계 무역을 지탱해온 체제는 여전히 작동할 수 있고, 만약 무너진다면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세계 무역 질서를 흔드는 ‘관세 전쟁’

-트럼프의 ‘관세 전쟁’이 세계 무역과 다자 무역 체제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문제는 각 나라가 미국이 벌인 관세 전쟁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인데, 지금까진 미국과 개별 협상하는 방식을 써왔다. 트럼프 행정부의 ‘너희가 관세 10%를 매기면 우리도 똑같이 10%를 매기겠다’는 식의 전략은 WTO 체제의 호혜 원칙과 상당히 다르다. 지금의 규칙 기반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트럼프 행정부가 원하는 새로운 무역 질서로 전환하는 건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규칙’이 아니라 ‘힘’에 기반한 무역 체제로 변하고 있다는 얘긴가.

“정확하다. 트럼프 행정부는 다자 무역 체제에 관심이 없다. 상대국이 미국과의 합의를 지키지 않으면 언제든 관세를 올리겠다고 위협한다. 이렇게 되면 기업들은 1년 뒤 관세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 어렵고, 투자는 불확실해진다. 세계 경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 뿐이다.”

-내년 미국의 중간선거가 상황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설령 (트럼프가 속한) 공화당이 패배하더라도 지난 4월 2일 ‘해방의 날’에 발표한 상호 관세 부과 정책 이전으로 돌아가긴 어렵다고 본다. 미국이 현행 무역 체제에서 멀어지려는 징후는 이미 10~15년 전부터 있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부터 WTO 상소 기구 위원의 신규 임명을 거부했던 것이다. 단순히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역풍을 맞거나 (트럼프) 정권이 바뀐다고 흐름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향후 4~5년 동안 WTO 회원국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핵심이다. 가장 낙관적인 전망은 회원국들이 현행 WTO 체제를 토대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고, 가장 비관적인 시나리오는 지금처럼 미국과 다른 나라들이 양자 간 차별적인 협정을 이어가면서 세계 무역 구조가 점차 무질서하게 붕괴되는 것이다.”

-미·중 무역 갈등은 점점 첨예해지는 양상인데.

“중국은 여전히 현행 다자 무역 체제에 큰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지난 6월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장관)도 WTO 각료회의에서 다자 무역 체제 지지를 재확인했다.) 다만 중국뿐 아니라 많은 신흥국·개발도상국이 높은 관세를 유지해 (관세를 내린) 선진국과 비대칭 구조가 생긴 점은 문제다. 이에 미·중 갈등 단순히 ‘중국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관세 비대칭’ 문제의 일부로 인식하고 WTO 체제 안에서 다루는 것이 더 건설적이다. 그렇게 해야 미국의 불만을 일부 해소하면서도 규칙 기반 무역 체제를 지킬 수 있다.”

◇WTO의 재탄생 가능성은

-WTO의 종말이란 말까지 나오는데, 재탄생이 가능할까.

“정확히 말하자면 ‘재탄생’보다는 ‘개혁’이라고 보는 게 맞는다. 지금의 다자 무역 체제에서 가장 큰 문제는 선진국과 신흥·개도국 사이에 벌어진 관세 격차다.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려면 신흥·개도국이 관세를 낮추도록 장려하는 새로운 협상 라운드가 필요할 수 있다. 선진국과 신흥·개도국은 모두 기존 규칙에 기반한 무역 시스템(WTO 체제) 안에서 협상에 참여할 수 있다. 핵심은 비차별성과 호혜주의라는 WTO 원칙을 유지하며 협상을 이어가는 것이다. 협상이 현행 체제 안에서 계속된다면 시스템은 무너지지 않는다. 1980년대 미국의 공격적 일방주의가 우루과이라운드를 촉발했고 WTO 탄생으로 이어졌듯, 지금도 위기를 계기로 새로운 라운드가 열릴 가능성이 있다. 이번 위기를 제도 개혁의 계기로 삼는다면 성공적인 협상이 가능할 것이고, 오히려 WTO 체제가 더 공고해질 수 있다고 본다.”

-WTO 회원국들이 아직 단합된 대응을 하지는 않는데.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 관세 발표 및 90일 유예 조치는 너무 갑작스러워 각국이 당황했고, 대응할 시간도 부족했다. 지금껏 몇몇 개도국은 WTO로부터 얻은 실익이 크지 않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이 보여주는 ‘무(無)규칙 세계’의 모습을 보면, WTO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지금은 전 세계가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규칙에 기반한 다자 무역 체제의 소중함을 다시 깨달을 수 있다면 그 대가는 헛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