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불황일 때 빚을 내 경기를 부양하고, 호황일 때 허리띠를 졸라매 빚을 갚는 건 재정 정책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나라가 이 상식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정치 논리를 경제 상식보다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대표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우고 파니자 부회장은 최근 WEEKLY BIZ와 화상으로 만나 이같이 경고했다. 그의 경고대로 세계는 ‘부채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지난 8일 프랑스 하원은 프랑수아 바이루 정부에 대한 불신임을 결정했다. 바이루 정부가 막대한 부채를 줄이기 위한 긴축 재정안을 들고나오자 의회가 반발한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도 정부 부채가 법정 한도에 다다르며 ‘국가 부도 위기’에 직면했다가, 의회가 한도 증액을 승인하며 가까스로 진정됐다. 부채가 세계 곳곳에서 갈등과 위기의 불씨가 되고 있는 셈이다.
세계의 부채 규모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지난 6월 ‘부채의 세계2025’ 보고서를 통해 글로벌 공공 부채(일반 정부 부채 기준)가 지난해 사상 처음 100조달러(약 14경원)를 넘었다고 밝혔다. 빚의 절대적인 규모만 커진 게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선진국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2005년 76.2%에서 올해 110.1%까지 치솟을 전망이다.
세계는 어쩌다 이토록 위험한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일까. WEEKLY BIZ는 국제 금융 및 부채 연구 분야의 세계 최고 전문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파니자 부회장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는 세계은행, UNCTAD의 재정·부채 분석 총괄 등을 거쳐 현재 제네바 국제개발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부채의 늪’에 빠진 세계
-세계 각국의 부채가 해마다 늘고 있다. 어떻게 진단하나.
“우선 부채가 많다고 꼭 나쁜 건 아니다. 부채 수준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채무자의 상환 능력을 함께 따져봐야 한다. 가령 일반인에게 1000만달러의 빚은 매우 큰 숫자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일론 머스크가 1000만달러 빚을 지고 있다면 대수롭지 않은 문제가 된다. 그는 수천억 달러의 자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부채도 마찬가지다. 절대 규모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의 비율을 살펴봐야 한다. 최근 이 수치가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세계 각국의 재정 건전성이 나빠지고 있다는 신호다.”
-선진국들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어떤가.
“국가별로 차이가 크다. 미국·일본·이탈리아는 GDP 대비 부채 비율이 매우 높다. 반면 독일·스위스·한국은 상대적으로 낮다. 문제는 최근 선진국들의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있는데 각국이 저마다의 이유로 부채를 늘리고 있는 점이다.”
-부채 증가는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가장 큰 부작용 중 하나는 금리 상승이다. 국가 부채가 늘면 (자금 시장에서 돈을 빌리려는 수요가 늘어나며) 균형 금리(자금의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지점에서 결정되는 시장 금리)가 오르고, 이는 투자와 경제 활동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 부채는 정치적 압력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연방준비제도에 금리 인하를 요구하며 압박하는 것도 결국 부채 상환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이로 인해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되고, 인플레이션 상승 등 각종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부채가 악순환의 시작인 셈이다. 그나마 미국처럼 자국 통화로 국채를 찍어내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험이 희박한 국가들이 이 정도다.”
-디폴트 위험이 있는 국가는 어떤가.
“부채 증가로 인한 문제가 훨씬 심각할 수 있다. 시장이 정부의 재정 여력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는 경기 침체 상황에서도 (국채 발행 등) 확장적 재정 정책을 펼칠 수 없다. 경제 위기가 닥쳐도 자금 조달 길이 막힌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경제 위기는 더 심화된다. 실제로 팬데믹 당시 유럽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독일과 같이 부채 리스크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한 국가들은 국민을 지원할 여력이 있었지만, 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는 그렇지 못하지 않았나.”
◇전기처럼 유용한 부채…남용하면 ‘감전’
-부채 증가를 긍정적으로 볼 여지는 없나.
“부채를 늘린 동기에 따라 다르다. 나는 부채를 전기에 비유하는 걸 좋아한다. 전기는 우리의 편리한 일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잘못 사용했다가는 감전될 수 있다. 부채도 마찬가지다. 팬데믹 때엔 많은 국가가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한 ‘좋은 동기’로 부채를 늘렸다. 마치 어둠이 오기 전에 전기로 불빛을 밝힌 것처럼 잘한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나쁜 동기’는 무엇인가.
“생산적이지 않은 일에 공적 자금을 투입해 부채를 늘리는 경우다. 가령 고소득층의 세금을 깎기 위해 부채 증가를 감수하는 일이다. 부자 감세는 장기적으로 자산 창출 효과는 거의 없고, 되레 재정 건전성을 해칠 가능성은 크다는 게 이미 여러 연구에서 확인된 바 있다.”
-세금 감면이 생산과 투자를 늘려 세수를 늘린다는 주장도 있지 않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논리 중 하나는 ‘공급 측 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이다. 세율을 낮추면 생산과 투자가 증가해 세수가 오히려 늘어난다는 이론이다. 이 논리는 과거 미국의 레이건 정부 시절 ‘래퍼 곡선(Laffer Curve·세율이 일정 수준을 넘기면 조세 수입이 줄어든다는 내용)’ 이론에 근거하지만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기본 재정 원칙 거스르는 美
-트럼프는 경제 성장을 위한 감세를 주장하는데.
“재정 원칙의 기본 중 하나는 ‘경기가 나쁠 때는 정부가 지출을 확대하고 부채를 늘릴 수 있지만, 경기가 좋을 때는 이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많은 국가가 이와 반대로 경기가 좋을 때 부채를 더 늘리고 있다. 미국만 봐도 그렇다. 현재 미국 경제는 비교적 호조를 보이고 있는데, 트럼프 정부는 대규모 감세안인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BBBA)’을 만들어 부채를 크게 늘리고 있다.”
-최근 미국의 부채 문제에 대한 경고가 잇따르고 있는데, 어떻게 보나.
“미국은 재정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길을 걷고 있다. IMF나 미국 의회예산처(CBO) 등 주요 기관들은 이번 감세안이 나오기 전부터 향후 30년 동안 미국의 부채 증가 리스크를 경고했다. 하지만 새로운 감세안은 상황을 한층 악화시켰다. 이 법안의 두 축은 세금 감면과 지출 삭감이다. 그런데 세수 감소 폭이 지출 삭감 규모보다 훨씬 커서 재정 적자 확대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호황기에 부채를 줄이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생기나.
“정말 필요할 때 부채를 늘릴 여력이 없게 된다. 예컨대 기후변화 대응이 그렇다. 지금은 ‘저탄소 경제’로의 대대적인 전환에 나서야 하는데, 부채 수준이 높으면 청정에너지에 대한 투자 여력이 제한된다. 일부 정치인은 이를 부정해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지구의 평균 기온은 계속 오르고 있고, 저탄소 경제로 나아가기 위해 막대한 재정 지출이 필요하단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고령화는 오히려 부채를 줄여야 할 명분”
-세계에서 부채 비율이 가장 높은 일본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일본의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236.7%(2024년 IMF 기준)로, 외형만 보면 심각해 보이지만 일본 정부 부채의 상당 부분은 자국 통화로 발행된 국채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일본은 정부 부채 중 일본 중앙은행, 일본의 금융기관과 국민들이 사들인 ‘엔화 발행 국채’가 많다. 외국인한테 빌린 돈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빚인 셈이다. 반대로 아르헨티나는 부채의 규모는 작지만 대부분이 외국에서 빌려온 돈이기 때문에 부채 리스크에 훨씬 취약하다. 물론 일본의 부채 규모가 절대적으로 많고 경제에 부담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일본은 고령화로 인한 복지·의료 지출이 커져서 부채 증가가 불가피한 게 아닌가.
“사실은 정반대가 돼야 한다고 본다. 인구가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국가에서는 언젠가 부채를 갚을 사람이 사라지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노동 가능 인구가 증가하는 시기에 부채를 늘리는 것이 맞는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노동 가능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는 장기적으로 부채 상환 능력이 저하되기 때문에 부채를 줄여야 한다.”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나.
“정치적 현실을 따지면 어렵다. 정치적으로는 현 세대 부담을 덜고 미래 세대에 부채를 떠넘기는 게 훨씬 쉽다. 하지만 인구 고령화가 지속되고, 생산 가능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부채를 늘리는 건 지속 불가능한 방향이 분명하다. 따라서 국가 재정의 지속 가능성 관점에서는 오히려 부채를 줄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전쟁·가난이 가속화한 부채 위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유럽 국가들이 정부 부채를 늘려 국방비를 마련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나.
“현실적으로 거스르기 어려운 추세다. 희망적으로 보자면 국방비 증가는 경제에 일부 긍정적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는 많은 기술은 원래 미국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 많다. 유럽이 국방비를 현명하게 사용한다면 기술 혁신에 일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국방비 증액으로 인한 문제는 없을까.
“물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스위스는 매우 낮은 수준의 정부 부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 전체가 국방비를 늘리자 스위스 역시 국방 지출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문제는 이를 보전하기 위해 해외 원조는 물론, 기술 투자와 교육 예산까지 줄이고 있다는 점이다. 매우 잘못된 접근이다. 연구·교육 예산을 줄이는 것은 국가 경쟁력에 큰 손실이다.”
-개발도상국들은 기술 혁신과 경제 성장을 위해 부채를 늘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재정 건전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사실 뾰족한 해법은 없다. 다만 가난한 국가는 ‘대출’보다 ‘무상 지원’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문제는 국제사회는 점점 개도국 무상 지원에 등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최빈국들이 주로 다자개발은행에서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엔 이마저 어려워져 개도국들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훨씬 높은 금리를 부담하게 됐다.”
-개도국을 지원할 현실적인 방안은.
“개도국을 ‘탄소 흡수원(carbon sink)’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여야 하는데, 녹림이 무성한 일부 개도국은 막대한 탄소를 흡수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 브라질의 아마존, 콩고의 숲 등이 그렇다. 이런 나라에 탄소 흡수를 명분으로 지원을 해야 한다고 본다.”
◇“韓, 이탈리아·일본 전철 밟을 수도”
-한국의 부채 수준에 대해 평가하자면.
“현재 한국의 정부 부채 비율은 GDP 대비 약 52.5%(2024년 IMF 기준)로, 국제 기준으로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낮은 편이다. 타당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부채를 늘릴 여력은 있다고 본다.”
-최근 이재명 정부는 내수 진작을 내세워 전 국민에게 소비 쿠폰을 지급했는데, 어떻게 보나.
“모든 국민에게 몇백 달러씩 지급하는 정책은 개인적으로 좋은 정책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는 실제 문제 해결보다는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표를 노린 정치적 수단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만약 한국 정부가 첨단 기술 연구·개발과 교육을 위해 부채를 늘리겠다고 하면, 나는 충분히 설득됐을 것이다. 이러한 투자는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위한 조언을 하자면.
“한국은 현대 경제사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을 이룬 나라다. 내가 학교에서 개발경제학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소개하는 사례가 바로 한국이다. 한 세대 만에 저소득 국가에서 고소득 국가로 도약한 거의 유일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한국의 선택은 신중해야 한다. 만약 정부가 단순히 ‘성장이 곧 회복될 것’이라는 낙관론에 기대어 부채를 늘린다면 일본과 이탈리아가 걸어간 위험한 길을 뒤따를 수 있다.”
-한국이 이탈리아나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될까.
“내 조국 이탈리아도 2차 세계대전 후 경제 기적을 이뤘고 그 기적은 20년 정도 지속됐다. 하지만 이후 성장이 정체됐는데도 사람들은 과거와 같은 호황이 돌아올 것이라 믿으며 부채에 기대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부채 규모는 통제가 어려운 지경까지 커졌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탈리아 경제의 구조적 문제로 남아있다. 일본도 비슷한 궤적을 밟았다. 한국은 아직은 (부채가) 관리 가능한 수준이지만 최근 경제성장률이 구조적으로 둔화되고 있다. 이를 부채로 메우려는 시도는 이탈리아와 일본의 전철을 밟는 일인 만큼 지금 특히나 신중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