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이 개최한 콘퍼런스에서 한 청중이 물었다.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를 비트코인이 대체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당시 세인트루이스 연은 수석 부행장이었던 데이비드 안돌파토는 이렇게 답했다. “만약 민간 가상 화폐가 달러를 대체할 수 있다면, 이는 달러가 안은 딜레마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언급한 ‘달러의 딜레마’는 미국이 달러를 계속 찍어 세계에 공급하면서 기축통화국으로서의 혜택을 누리지만, 그 과정에 무역 적자와 국가 부채가 계속 늘어나 국내 경제가 악화하는 상황을 일컫는다.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이 1960년대에 제기해 트리핀 딜레마라고 불리는 이 역설은 막대하게 불어난 무역 적자와 국가 부채에 억눌린 미국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최근 많이 거론되고 있다.
당시 안돌파토의 발언은 연준의 고위급 인사가 국가 중심의 통화 시스템을 가상 화폐(코인)로 대체할 가능성을 언급한 첫 사례로 큰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7년이 지난 지금, 미 정부는 비트코인 대신 다른 코인을 집중적으로 공략 중이다. ‘1코인=1달러’로 코인 가치가 법정 화폐에 고정되도록 설계한 스테이블코인(stablecoin) 관련 법을 제정해 제도권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민간 스테이블코인 생태계를 키우려 하고 있다.
2022년부터 마이애미대 경제학과에서 가르치고 있는 안돌파토 교수를 지난달 ‘세계 경제학자 대회’가 열린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만났다. 그는 “현재 디지털 통화는 미국이 선택한 민간 중심과 국제결제은행(BIS)을 구심점으로 하는 중앙은행 중심 모델의 두 축으로 각각 발전하고 있다. 대조적인 여러 방식이 동시에 추진되는 지금의 상황은 아직 논의가 진행 중인 한국 같은 국가에 각각의 장단점을 두루 살필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스테이블코인 효과, 미 재무부 기대 못 미칠 수도”
-미국이 스테이블코인 관련법을 제정하는 등 이 분야를 띄우려 하는 이유가 뭔가.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미국 국채 수요를 늘리려 한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스테이블코인 규제를 담은 법에도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규모에 상응하는 현금 혹은 단기 국채 등을 준비금으로 쌓아두어야 한다는 점이 명시됐다. 국채 수요 증가는 국채 금리 하락(국채 가격 상승)을 의미하기 때문에 미 재무부 입장에선 반길 만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국채 시장에 스테이블코인이 큰 영향을 미치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테더·USDC(발행사 ‘서클’) 같은 주요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발행액 대비 꽤 높은 비율의 현금·국채를 준비금으로 쌓아둔 상태다. 이 비율이 낮은 편인 테더도 70% 이상, 서클은 이미 거의 전부를 적법한 자산으로 적립해두었다. 생각보다 추가 매수 수요가 크지 않을 수 있다.”
-달러와 가치가 같다면, 스테이블코인은 왜 필요한가. 그냥 달러를 쓰면 되지 않나.
“나는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한 디지털 기술 발전이 결제를 훨씬 더 원활하게 만들고 있다고 확신한다. 내가 열 살 때인 1971년에 이탈리아로 가족 여행을 갔던 때가 기억난다.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여행자 수표를 발급받고, 이탈리아에 도착해 이를 바꿔줄 환전소를 찾아 150㎞ 정도를 운전해서 가야 하는 식이었다. 이젠 신용카드만 들고 해외여행을 해도 거의 문제가 없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보다 더 나아가) 결제의 비용과 시간을 추가로 줄여줄 잠재력이 있다고 본다.”
-일부에선 스테이블코인을 악용한 돈세탁 등 범죄 위험을 우려하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스테이블코인이 없어서 범죄자들이 돈세탁을 못하나. 범죄의 부작용도 걱정해야 하지만, 이 때문에 모든 걸 멈출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범죄자들은 기존의 은행 시스템과 현금을 통해서도 충분히 돈세탁을 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지만 범죄에 대한 우려로 은행 수준을 뛰어넘는 규제를 한다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코인런 위험, 은행보다 오히려 낮다”
일부 전문가는 스테이블코인 규모가 지나치게 커진 가운데 사람들이 코인을 일제히 내다팔려는 ‘코인런’이 발생할 경우 발행사가 국채를 급히 매도하면서 금융 시장 전체로 위험이 번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중앙은행 출신 학자 및 통화 정책 당국자들을 중심으로 이런 우려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안돌파토 교수는 중앙은행 출신이면서도 “은행 예금에 발생하는 ‘뱅크런’보다 스테이블코인이 초래할 ‘코인런’ 위험이 더 낮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코인런 위험이 크지 않다고 보는 이유는.
“일단은 위에 언급한 대로, 주요 스테이블코인은 현금과 국채로 상환을 위한 준비금을 상당히 적립해두었다. 준비금 규모가 은행보다 큰 셈이다.”
-상환 주문이 몰려 발행사가 국채를 일제히 내다 팔면 채권 시장에 큰 혼란이 오지 않을까.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적립한 국채는 대부분 만기가 수십 일 남은 단기 국채다. 이런 단기 국채는 사실상 현금과 같아서 유통이 아주 잘된다. 전체 채권 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크지 않다. 코로나 팬데믹 당시 국채 금리 급등 현상은 만기 10년짜리 국채에서 대부분 발생했다.”
-한국 정부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논의 중이다. 달러가 아닌, 한국 원화 같은 통화의 스테이블코인도 쓸모가 있을까.
“사람들이 스테이블코인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스테이블코인은 ‘온라인 예금’의 화려한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질문을 ‘달러 예금이 있는데 원화 예금이 필요할까’라고 바꿔서 생각해 보면 어떤가. 답은 ‘왜 안 되겠나’가 아닐까. 선택지가 늘어나면 소비자에겐 거의 항상 득이 된다. 물론 스테이블코인의 이런 특성을 감안하면, 은행에 준하는 규제 또한 갖출 필요가 있다.”
◇키워드: 스테이블코인(stablecoin)
미국 달러 등 법정 화폐에 ‘1코인=1달러’처럼 가치가 연동하도록 설계된 가상 화폐. 가치가 안정적이라는 뜻의 ‘스테이블’과 가상 화폐를 가리키는 ‘코인’을 결합한 단어다. 현재 통용되는 가상 화폐의 99%는 미 달러와 가치가 연동된다. 한국 정부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추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