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한국 증시의 저평가와 관련해서 일본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내수 주도인 일본과 한국은 경제 상황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최근 전문가 중엔 대만을 대신 연구하는 이들이 늘었습니다.”
한국 가치 투자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이채원 라이프자산운용 의장은 최근 한국 투자자 사이에 큰 화두인 ‘밸류업(한국 주식 저평가 해소)’에 대해 묻자 “대만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했다. 실제로 최근 만난 시장 전문가 중엔 한때 연구 대상이었던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경제 정책) 대신 ‘타베노믹스’(대만 수도인 타이베이+경제 정책)를 공부하고 있다는 이가 많았다.
대만과 한국은 닮은 점이 많다. 수출이 경제를 주도하고 중국과 북한이라는 위협이 상존하며 정보기술(IT) 분야에 매진해 글로벌 경제의 중요한 플레이어가 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반면 주식시장만 보면, 대만의 그간 ‘성적표’가 훨씬 좋다. 지난해 대만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상장 주식 시가총액은 289%로 한국(90%)의 세 배 수준이 넘는다. 주식시장의 PBR(주가순자산비율, 낮을수록 저평가)은 대만 2.39배, 한국 1.04배로 차이가 크다. 대만 증시는 어떻게 ‘몸값’을 올렸을까.
◇긴 호흡으로, 예측 가능한 증시 ‘밸류업’
“과거부터 대만은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외국 자금을 반드시 유치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러려면 외국인 투자자의 눈높이에 맞춘 주식시장의 지배 구조를 갖출 수밖에 없었죠.” 대만인이자 대만 시장 전문가인 왕수봉 아주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만 정부는 외국인 투자자 유치를 위해 소액주주 집단소송이 많은 미국을 벤치마킹해 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정권이 바뀌어도 이 기조는 유지됐다”고 했다.
외국인 자금의 중요성을 체감한 대만의 증시 선진화 정책은 지난 20여 년에 걸쳐 꾸준히 진행됐다. 2003년에 행정원(총리실 격) 기업지배구조 전담반을 설치하고 2006년엔 이사회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증권거래법을 개정했다. 한국에선 지난 3일 상법이 개정되면서 ‘이사는 (회사뿐 아니라) 주주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내용이 추가됐지만, 대만은 이미 2006년 증권거래법 개정 때 ‘이사는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위하여 충실하게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소액주주들이 주주총회 장소에 갈 필요 없이 의결권을 편히 행사하도록 돕는 전자 투표 의무화도 대만이 한국을 한참 앞섰다. 한국은 지난 3일 개정된 상법을 통해 내년부터 전자 투표를 2조원 이상 대형 상장사에 한해 일부 의무화했는데, 대만은 전자 투표 의무화를 2017년 일찌감치 시작했다. 도입 당시엔 자본금 약 900억원 이상 상장사, 2023년부터는 모든 상장사를 대상으로 전자 투표가 의무화됐다. 황현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대만 정부는 기업 지배 구조 개선에 대해 긴 호흡을 가지고 지난 20년에 걸쳐 주주 권익 보호책을 확대해 왔다. 미리 적용 시점을 예고하고 차근차근 추진하면서 예측 가능한 제도 개선책을 내놓은 점이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상연 신영증권 연구원은 “대만은 아시아 외환 위기(1997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을 거치며 외국인 자금의 중요성을 체감했고 증시 선진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며 “2015년 6월 지배 구조 우수 기업으로 구성되는 ‘기업 거버넌스(지배 구조) 100’ 지수를 개발해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지배 구조 점수 상위 20% 기업의 명단도 공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기업 간에 자발적인 경쟁심을 유발했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했다.
◇국민의 배당 재테크 위해 ‘부자 감세’ 부담 감내
많은 투자 전문가는 한국 증시가 이재명 정부의 목표인 ‘코스피 5000’을 달성하기 위해선 세법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금융 소득이 2000만원을 넘으면 종합소득에 합산돼 최고 세율 49.5%를 적용받는 배당소득세, 최고 세율이 사실상 60%에 달하는 상속세 등이 대주주의 주가 부양 의지를 꺾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공감대도 어느 정도 형성돼 있어 개정이 종종 시도되지만 그때마다 ‘소수의 부자(富者)만을 위한 감세’라는 비난이 일며 무산되는 상황이다.
대만 정부도 비슷한 고민을 했지만 결국은 배당소득세와 상속세를 과감히 개편했다. 왕수봉 교수는 “대만은 금리가 낮은 편이어서 대만 국민은 배당을 ‘저축’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정부도 배당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국민의 ‘배당 재테크’를 위해서라도, 대주주가 배당을 늘리는 데 제약 요건을 없애주려 애쓴다는 뜻이다.
과거 대만의 배당소득세 과세 방식은 배당을 많이 받을수록 불리하고 산법(算法)까지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에 대만 정부는 2018년 배당소득을 분리과세하는 동시에 종합소득에 포함될 경우 최고 45%를 적용하던 배당소득세율을 28%로 통일하기로 했다.
상속세도 파격적으로 낮췄다. 기존 최고 세율은 50%였지만 2008년에 세법을 개정해 상속세율을 10%로 통일했다. 당시 대만 재정부(재무부)는 자본의 해외 유출 방지, 중소기업의 원활한 경영 승계 유도, 자산가의 대만 내 투자 촉진 등을 이유로 들었다. 홍콩·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 주변국 상속세가 거의 없어 자산가들의 돈이 계속 빠져나가는 문제도 해결하겠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대만 정부는 경제적 형평성을 위해 상속세에 다소 차등을 두는 것도 좋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권고를 받아들여 올해부터 상속세에 누진세를 적용 중이지만, 최고 세율이 20%로 한국보다는 여전히 매우 낮다. 이채원 의장은 “대만이 배당소득을 분리과세하고 상속세를 낮춘 이후 한때 한국보다 시총이 낮았던 대만 증시가 네 배 상승하며 한국을 앞서기 시작했다. 세제 개편만으로 올랐다고 하긴 어렵겠지만 중요한 동력이 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한 증권사의 고위 임원은 “주식의 저평가를 해소하기 위해선 지배 구조 개선 조치도 중요하지만 결국 증시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기업이 얼마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해낼 수 있느냐는 것”이라며 “기업을 징벌의 대상으로 보거나 기업을 옭아매는 과도한 규제를 과감히 철폐하지 않는 한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완전히 해소되긴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