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뉴욕시의 주택 재건축 매장에 구리 파이프가 전시되어 있다. /연합뉴스

미국이 철강, 자동차 등에 이어 구리에도 고율의 품목 관세 부과를 예고하며 국제 구리 가격이 요동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일 백악관 내각 회의에서 미국으로 수입되는 구리에 50%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예고한 데 이어 다음 날인 9일엔 구리 관세가 다음 달 1일부터 적용된다고 자신의 소셜미디어인 트루스소셜을 통해 밝혔다. 트럼프가 지난 2월 상무부에 구리 수입이 미국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지 조사하라고 한 이래 구리에 대한 관세 부과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지만, 예상보다 높은 세율과 빠른 적용 시기는 시장에 충격을 안겼다고 로이터 등 주요 외신은 보도했다.

그래픽=김의균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지난 8일 뉴욕상품거래소(COMEX)에서 구리 선물 가격은 전장 대비 13.1% 급등하며 파운드당 5.69달러를 기록했다. 하루 상승률 기준으로 1989년 이후 최대 상승 폭이다. 이후 17일 현재까지도 구리 가격은 5.50달러 선에서 고공 행진하고 있다.

◇美, 왜 구리에 관세 매기나

그렇다면 미국은 왜 구리에 고율의 관세를 매기기로 했을까. 이는 자국 구리 산업을 보호하고, 중국의 광물 지배력에 맞서기 위한 전략적 판단 때문으로 해석된다. 미국의 구리 매장량은 세계 6위이지만, 사용되는 구리의 40% 이상을 수입하고 있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미국의 구리 수입량(2020~2023년 정제 구리 평균치) 가운데 약 65%는 칠레, 17%는 캐나다, 9%는 멕시코에서 들여온다. 이 국가들은 모두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수입 구리에 고율 관세를 적용한다는 생각이다. 그는 지난 10일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구리는 반도체, 항공기, 선박, 탄약, 데이터센터, 리튬이온 배터리, 레이더 시스템, 미사일 방어 체계 그리고 미국이 대량으로 생산 중인 극초음속 무기에까지 필수적인 광물 자원”이라며 “그런데 왜 우리의 어리석고 게으른 지도자들은 이 중요한 산업을 망쳐 놓았는가”라고 썼다.

트럼프의 이번 조치는 중국의 전략 광물 공급망 장악에 대한 견제 성격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의 구리 수입에서 중국산 비율은 크지 않지만, 희토류 등 주요 광물 등에 대한 중국 의존도는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이 올해 희토류 대미 수출을 제한하며 희토류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한 것이 트럼프가 중국에 대한 관세와 수출 통제를 완화하는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AI 산업이 띄운 ‘구리 전성 시대’

미국이 외국산 구리에 고율 관세를 예고한 데는 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의 급성장으로 구리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는 판단 역시 작용했다. 특히 AI의 ‘두뇌’ 역할을 하는 고성능 연산 시스템이 집중된 데이터센터는 구리의 대표적 수요처로 떠올랐다.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 공급과 냉각 설비가 필수인 만큼 배선·통신 등 전 영역에 구리 부품이 대거 투입된다. AI 산업이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데이터센터 건설이 우후죽순 이뤄지면서 구리가 AI 시대의 핵심 자원으로 떠올랐다는 평가다.

방위산업에서도 구리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구리는 전기·열전도성이 탁월해 레이더, 미사일, 잠수함 등 각종 군사 장비 제작에 필수적인 금속으로 꼽힌다. 트럼프 역시 지난 10일 트루스소셜에서 “구리는 (미국) 국방부가 둘째로 많이 사용하는 자재다. 미국은 다시 한번 압도적인 구리 산업을 일으킬 것이다”고 했다. 방위산업 발전을 위해 구리가 핵심 자원임을 숨기지 않은 셈이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 재료로 쓰이는 구리 수요는 앞으로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세계 최대 원자재 기업 글렌코어는 “앞으로 글로벌 수요를 맞추려면 매년 구리 공급이 100만t 이상 추가돼야 한다”고 내다봤다. 이는 세계 최대 구리 광산인 칠레 에스콘디다 광산의 연간 생산량에 맞먹는 수준이다.

◇구리 관세의 충격파는

문제는 트럼프의 구리 관세가 자국 내 구리 산업을 되살릴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도 적잖다는 점이다. 관세를 높여 외국산을 막아도 미국 내에서 구리 생산을 단박에 늘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에선 환경 규제나 주민 반대 등으로 새로운 광산을 개발하는 데에만 평균 29년이 걸린다고 S&P글로벌은 집계했다. 이는 잠비아에 이어 세계에서 둘째로 긴 수준이다.

되레 구리 관세의 부담은 미국 기업과 소비자들에게 전가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나온다. 골드만삭스의 데이비드 메리클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관세로 인한 비용 중 약 40%는 미국 소비자, 또 다른 40%는 미국 기업이 부담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업들은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반영하게 되고, 결국 이는 소비자 가격 인상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한국 기업들도 긴장하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 생산되는 전기차에 구리가 다량 투입되는 만큼, 관세 부담이 차량 생산 비용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단순한 원가 상승을 넘어 납기·생산 일정까지 차질을 줄 수 있어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