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의균

일본 도쿄에서 남서쪽으로 30㎞ 정도 떨어진 가나가와현의 닛산자동차 옷파마 공장. 축구장 230여 개 면적의 이 광활한 공장은 1945년 패망한 일본이 전후(戰後) 세계 자동차 강국으로 부활한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다. 본래 일본군 비행장이었던 터는 미국 점령군의 차량 수리 기지로 전락했다가, 1961년 닛산자동차의 자동차 공장으로 다시 출발했다. 일본 최초의 승용차 대량생산 공장이다.

닛산 옷파마 공장은 일본 자동차 산업의 기술 진화를 상징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닛산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여러 차종을 한 자리에서 동시 생산하는 혼류(混流) 생산 라인을 도입했다. 1970년엔 일본 최초로 용접 로봇도 도입했다. 2010년에는 이곳에서 전기차 리프(Leaf) 양산이 시작된다. 콘셉트카나 소량 생산이 아닌 정규 라인에서 본격적으로 전기차를 찍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리프는 ‘세계 첫 대량생산 전기차’였다. 미국 테슬라가 모델3를 출시한 2017년보다 무려 7년이나 앞선 시점이다.

그래픽=이진영

‘전후 일본 부흥을 견인한 공장’이라던 옷파마 공장은 조만간 역사 뒤안길로 사라진다. 닛산은 옷파마 공장을 포함해 일본 공장 2곳과 해외 공장 5곳을 폐쇄할 계획이다. 2027년까지 직원 2만명도 감원한다. 가나가와현의 구로이와 유지 지사가 공장 폐쇄에 강하게 반발했지만 닛산자동차의 이반 에스피노사 사장은 요지부동이다.

현재 옷파마 공장엔 직원이 약 3900명 남아 있지만, 닛산은 이들을 더 떠안을 여력이 없다. 2024년 회계연도(2024년 4월~2025년 3월)에만 적자를 6708억엔(약 6조4000억원) 낸 닛산은 실적 전망치조차 제시하지 못한 채 자력 생존이 의문시되는 최악의 상황이다. 한때 일본 자동차 산업의 기술력을 대표하던 닛산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WEEKLY BIZ가 닛산의 추락 과정을 짚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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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요인 ①: 무책임한 위원회 경영

닛산은 녹록한 회사가 아니었다. 2017년 상반기만 해도 닛산은 르노, 미쓰비시와 함께 얼라이언스(연합체)를 구성해 세계 자동차 판매량 1위를 차지했다. 당시 6개월 동안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는 총 527만대를 팔아 폴크스바겐그룹(516만대), 도요타(513만대), 제너럴모터스(470만대)를 제쳤다. 프랑스 르노를 제외한 닛산 단독 실적만 놓고 봐도 저력은 분명했다. 2010년 408만대였던 닛산의 연간 판매량은 2017년엔 577만대로 정점을 찍었다. 2018·2019년에도 500만대 안팎을 유지했다. 하지만 2020년 판매가 급감해 405만대로 내려앉았고, 지난해엔 335만대까지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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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닛산의 몰락 요인으로 자주 지적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현재의 ‘위원회 경영 체제’다. 2018년 카를로스 곤 회장이 물러나고 리더십을 잃은 닛산은 무려 60명 이상이 경영 의사 결정에 관여하는 위원회 경영 체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효율성과 리더십 모두를 갉아먹고 있다는 평가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이런 리더십을 두고 “닛산은 ‘V 자 회복’의 시나리오마저 그리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아픔을 감내하는 개혁을 추진하려 해도 (집단 리더십 구조로) 넘기 어려운 높은 장벽이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지난 4~5년 동안 세계 자동차 시장에는 코로나 팬데믹, 반도체 공급난, 전기차 전환 충격, 미국 추가 관세 등과 같은 자동차 업계의 생사를 가를 외부 충격이 연이어 닥쳤지만, 닛산에는 리더십이 사실상 부재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의사 결정은 늘 한 발 늦었고 인사 철마다 자리 싸움으로 조직 혼란만 가중시켰다.

닛산은 현재 지명위원회, 감사위원회, 보수위원회 등 세 위원회를 두고 경영과 감시를 완벽하게 분리한 체제다. 최고경영자(CEO) 등 주요 임원은 지명위원회가 선임하고, 감사위원회는 경영진을 감시하며, 보수위원회는 경영진의 연봉을 가지고 전횡을 막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눈치를 보다 보니, 누구도 경영 실패에 책임지지 않고, 경영진도 각자 자리 보전에만 연연하는 상황이 됐다. 예컨대 올 1월 취임한 닛산의 최고재무책임자(CFO) 제레미 파팽은 지난해 실적 악화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북미 닛산의 대표였다. 같은 시기에 실적 악화로 경질된 CFO 스티븐 마는 현재도 중국 사업 총괄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직원 2만명 감원을 발표해 직원들의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닛산이지만 정작 경영 책임을 져야 할 최고위급 임원 가운데 물러난 인물은 우치다 마고토 전 사장 등 소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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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요인 ②: 주먹구구식 전략

닛산은 지난해 3월, 오는 2027년 3월까지 연간 자동차 판매 대수를 100만대 이상 늘리겠다는 ‘디 아크(The Arc)’ 전략을 발표했다. 전기차(EV)를 포함해 신모델 30종을 3년 안에 선보이며, 도약하는 성장 곡선(아크)을 그리겠다는 계획이었다.

직원 수 13만명이 넘는 닛산이 내놓은 야심 찬 전략은 그러나 단 3개월 만에 사실상 실패로 판명 났다. 지난해 2분기에는 엔저라는 호재에도 불구하고 전년 1285억엔(약 1조2200억원)이었던 영업이익이 10억엔으로 99% 감소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팔 만한 신차가 없었다. 예컨대 지난해 북미 시장에서는 하이브리드차 인기가 치솟았는데 닛산에는 마땅한 하이브리드 모델이 하나도 없었다. 경제 주간지 도요게이자이는 “제대로 된 신차가 없는데 높은 목표만 세운다고 판매가 늘 리 없다”며 “코로나 팬데믹 당시 (차량용) 반도체 부족에 따른 공급 감소로 ‘만들면 팔리는’ 비정상적 상황이 끝났고 이제는 각 기업의 진짜 실력이 실적을 가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당황한 닛산 경영진은 북미 시장에서 판매량이 줄자 현금 인센티브라는 단기 처방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대리점이 차를 팔 때마다 내주는 차량당 인센티브를 4000달러(약 550만원)로 대폭 인상하고, 재고 밀어내기에 나섰다. 대당 인센티브가 1500~1800달러인 도요타의 2.5배인 현금 전략을 쓴 셈이다. 이런 ‘현금 밀어내기’ 전략으로 닛산이 6개월간 쓴 돈만 약 5600억엔(약 5조3000억원)으로 추정된다. 실속 없는 전략과 무리한 인센티브가 경영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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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요인 ③: 지속적인 전기차 失機

닛산은 원래 전기차 시대를 이끌 잠재력을 갖춘 기업이었다. 1933년 설립한 닛산자동차는 군국주의 시절 일본의 첨단 산업 재벌 그룹인 ‘닛산콘체른’의 핵심 계열사였다. 닛산(日産)이란 이름도 니혼산쿄(日本産業·일본 산업)에서 유래했다. 일본이 패전한 뒤 닛산콘체른은 해체됐지만 닛산자동차는 살아남았다. 특히 해체된 항공기 제조업의 기술 인재들을 흡수해 일본의 대표 기술 기업으로 성장했다. 1966년엔 스포츠카를 전문으로 만들던 프린스자동차를 인수해 기술력을 강화했다.

닛산은 이런 기술 저력을 바탕으로 전기차 개발에도 남보다 앞서 뛰어들었다. 테슬라가 급부상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기차의 선구자’는 닛산이었다. 닛산의 전기차 기술 축적은 194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닛산은 당시 납축전지를 이용해, 한 번 충전으로 최장 96km를 달리는 ‘타마’를 내놨다. 닛산이 2010년 말 출시한 ‘리프(Leaf)’는 세계 최초 대량생산 전기차였다. 2019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전기차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닛산의 전기차 기술력은 테슬라는 물론이고, 현대차·도요타·BYD(비야디) 등 주요 경쟁사에 밀린다는 게 중론이다. 경쟁사 대부분이 전기차 전용 플랫폼(기본 설계)을 쓰는 마당에, 닛산은 여전히 내연기관의 플랫폼을 개조해 쓰고 있다. 배터리 역시 외부 업체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자율주행 기술이나 소프트웨어 성능도 한참 뒤처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기술력 약화의 배경으로는 오락가락한 전기차 투자 전략이 꼽힌다. 2010년 리프 출시 이후 두 번째 전기차인 아리야가 나오는 데만 10년이 걸렸다. 당시 CEO 카를로스 곤 회장은 재임 초창기엔 전기차에 강한 의지를 보이다가 점차 ‘세계 최대 자동차 기업’이란 규모의 경제에 치중했다. 전기차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2018년 11월 일본 검찰이 곤 전 회장을 배임 등의 혐의로 체포한 뒤, 후임으로 취임한 우치다 마코토 전 사장도 한동안 영업이익 중시 전략을 펴다가 2021년 말에야 ‘5년간 전기차 2조엔 투자 전략’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후 배터리 공장 계획은 무산됐고, 전기차 출시 일정도 줄줄이 미뤄졌다.

닛산은 전기차 신모델뿐 아니라 하이브리드 신차도 제대로 내놓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지난 3월 물러난 우치다 전 사장은 “수요에 맞춰서 적기에 신제품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올해 닛산은 요코하마 소재 본사 건물을 1000억엔 이상에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당초 예상보다 600억엔 정도 더 들어가는 올해 구조조정 비용을 감당하기 위한 조치다. 당장 본사까지 파는 마당에 전기차 투자는 또다시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테슬라, BYD 등과 벌어진 전기차 기술 격차는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실패 요인 ④: 독이 된 곤의 구조 조정

닛산은 대규모 구조 조정을 통해 ‘V 자 회복’을 이뤄낼 수 있을까. 닛산에는 과거 극적인 반등 기억이 있다. 주인공은 곤 전 회장이다. 1999년 회계연도에 닛산은 6843억엔(약 6조5000억원)이라는 대규모 적자와 부채 약 2조엔을 떠안고 파산 직전이었다. 당시 구원투수로 등장한 프랑스 르노는 닛산에 자본을 투입하고, 곤을 파견했다. 곤 전 회장은 곧바로 일본 무라야마 공장을 포함해 공장 5곳을 폐쇄하고, 그룹 전체 인원의 14%인 2만1000명을 감원했다. 이른바 ‘곤의 리바이벌 플랜(Revival Plan·회생 계획)’이었다.

곤 전 회장은 닛산 계열 부품사에 납품하는 단가를 절반 수준으로 깎는 비용 절감 정책을 밀어붙였고, 이 때문에 ‘코스트 킬러(Cost Killer)’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닛산은 2000년 회계연도에 3310억엔 흑자를 기록, 극적인 V 자 회복에 성공했다.

그러나 지금 일본 언론들은 “이번엔 ‘V 자 회복’은커녕 독자 생존도 어려운 것 아니냐”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닛산은 공장 폐쇄와 2만명 감원 등을 통해 연간 비용 5000억엔 절감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 효과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부과한 25% 자동차 추가 관세로 사실상 상쇄될 가능성이 크다. 관세 영향으로 닛산은 연간 4500억엔 추가 손실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곤 전 회장의 극단적 구조 조정이 결국 ‘저주’로 돌아왔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18년에 이르는 비용 절감 중심 경영이 오히려 종업원의 사기 저하와 기술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제2의 구원투수 찾을까

닛산의 마지막 희망은 르노에 이은 ‘제2의 구원투수’다. 지난해 12월 닛산이 혼다와 경영 통합을 추진하면서 시장엔 ‘혼다발(發) 재건’ 기대감이 일었다. 양사는 공동 지주회사를 설립하고 그 산하에 두 회사가 들어가는 경영 통합을 추진했다.

하지만 닛산 경영진이 올 초 혼다가 요구한 공장 폐쇄와 추가 감원 등 대규모 구조조정을 거절해 협상은 틀어졌다. 이후 혼다는 닛산을 자회사로 만드는 수정안을 다시 제시했지만 회의는 결렬됐다. 일본 언론은 “닛산이 대등한 통합에만 집착해 협상을 무산시켰다”고 전했다.

중동 레바논에서 도피 생활 중인 곤 전 회장은 이런 상황에 쓴소리를 남겼다. 그는 일본 주간지 인터뷰에서 “(통합 무산은) 자존감이 너무 높은 닛산의 문제”라며 “과거의 성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닛산 직원들이 혼다의 자회사가 돼야 한다는 조건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 닛산의 이반 에스피노사 사장은 “혼다는 여전히 협력 가능성이 있는 파트너 중 하나”라며 “여러 파트너와 협력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는 최근 전기차 위탁 생산 시장에 뛰어든 대만 폭스콘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된다. 폭스콘은 지난달 도쿄에서 전기차 사업 설명회를 열고 일본 시장 진출 계획을 공개했다. 애플 아이폰을 위탁 생산하는 세계 최대 전자제품 제조 업체인 폭스콘은 2020년부터 전기차 위탁 생산 사업에 진출했으며, 최근에는 미쓰비시자동차의 전기차 물량도 일부 수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닛산은 전기차를 세상에 가장 먼저 내놓고도 후속 투자를 못 해 이제는 ‘살 만한 차가 없는 브랜드’로 이미지가 굳었다”며 “닛산은 이제 가치가 떨어진, 그러면서 세계적 공급망은 갖추고 있는 좋은 먹잇감 정도로 전락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