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발전은 친환경 에너지일까, 아닐까. 조만간 내려질 유럽연합(EU)의 결정에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프랑스 파리 북부 지역에서 열린 민간 분야 원자력 기업·기관들의 최대 행사 ‘세계원자력박람회(WNE)’ 개막식 연설에서 카드리 심슨 EU 에너지 담당 집행위원은 “EU 집행위원회(유럽연합의 행정부)는 앞으로 몇 주 안에 원전이 투자자를 위한 지속가능 활동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 분명히 할 것”이라는 말로 결정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EU 집행위원이 이 행사에 참석해 연설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내년에는 원자력 부문에서 중요한 구조적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며 EU가 원전을 친환경 에너지원으로 규정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미국 경제매체 블룸버그는 EU가 12월 22일 발표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 날 EU가 ‘녹색 분류 체계(Green Taxnomy)’에 원전을 포함시킨다면 원전을 친환경 에너지로 공인(公認)하는 셈이 된다. 녹색 분류 체계는 녹색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친환경 산업과 그렇지 않은 산업을 구분하는 정책 기준이다.

탄소 중립을 주도하고 있는 EU가 원전을 친환경 에너지로 규정할 경우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 탈(脫)원전 압박에 시달려온 글로벌 원전 산업 입장에선 그야말로 부활의 신호탄이다. 블룸버그는 “EU의 결정을 전 세계 투자자들이 주시하고 있다”며 “친환경으로 분류되면 민간 금융으로부터 수십억유로 자금을 유치할 수 있는 잠재력이 생긴다”고 했다. 반면 환경단체 등 탈(脫)원전 진영은 “방사성 폐기물이 파생되는 원전이 청정 에너지라는 건 전형적인 ‘그린워싱(친환경 위장술)’”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EU 회원국 간에도 찬반 세력 대결이 이어지는 등 논쟁이 격렬하다. 원전 산업의 운명과 녹색 경제의 향방을 좌우할 이번 결정이 가진 배경과 의미, 여파를 WEEKLY BIZ가 분석했다.

◇ 원전은 친환경? 녹색 경제 운명 가를 EU 결정 임박

원전이 EU 녹색 분류 체계에 편입돼 친환경 에너지로 인정받게 될 경우 파급력은 엄청날 전망이다. 당장 1조유로(약 1333조원) 규모에 달하는 EU 기후변화 대응 투자 예산(그린딜)을 원전에 쓸 수 있게 되고, 관련 기업들은 녹색채권을 발행해 더 많은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된다. 녹색채권은 재생 에너지 같은 친환경 사업에만 사용이 한정된 채권이다. 블룸버그NEF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녹색채권 발행액은 3053억달러(약 360조원)로 7년 새 21배 증가했다.

반면 기존 신재생 에너지 산업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영국 서식스대학교와 독일 국제경영대학원(ISM) 연구팀은 과학 학술지 ‘네이처’ 게재 논문을 통해 “원전에 대한 대규모 신규 투자가 이뤄지면 재생에너지가 기후변화에 대응할 능력과 이득이 억제될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EU가 원전을 친환경 에너지로 규정하느냐는 더 나아가 세계 탄소경제의 운명과도 직결된다. EU가 이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을 넘어선 리더십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전 세계 녹색경제 체제의 근간으로 자리 잡은 탄소배출권 거래(ETS) 시장에서 유럽 지역은 88.3%(작년 거래액 기준)의 비율을 차지한다. 원전이 편입되면 탄소 중립 수단이 늘어나는 만큼 EU가 ‘배출 허용 총량 규제’를 강화해 기업에 할당되는 탄소배출 총량을 한껏 낮출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배출권 가격이 크게 뛸 수 있다. 또 배출권 가격은 EU가 2026년부터 도입하기로 한 탄소국경세의 기반이 되므로 한국을 포함한 무역 상대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EU의 결정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작용해 원전 건설을 망설이는 다른 나라에도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전망이다. EU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든 녹색 분류 체계는 국제표준화기구(ISO)에서 제정 중인 녹색금융 국제표준(ISO 14030)에도 비중 있게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환경부도 EU 기준을 참고해 한국형 녹색 분류 체계인 ‘K-택소노미’를 준비 중이다.

◇에너지 대란이 촉발한 원전 회귀

발전 시 탄소 배출량이 제로(0)에 가까운 원전이 그간 친환경 에너지로 대접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안전성 논란에 있다. 미국 스리마일 섬 원전 노심 융해(1979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폭발(1986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2011년) 등 잊을 만하면 터지는 대형 원전 사고는 원전 르네상스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고 원전을 계륵(鷄肋)처럼 만들어 버렸다. 미국의 경우 스리마일 원전 사고 후 30여 년간 자국 내 원전 건설을 중단시켰고,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자로 50기 중 46기를 폐쇄했다. 체르노빌 사고 전까지만 해도 매년 폭발적으로 늘던 전 세계 원자력발전소 수는 1990년대부터 성장세가 확 꺾였다.

유럽 역시 최근까지 이런 경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현재 EU 내 원전 찬성파 국가들을 이끄는 프랑스 마크롱 정부 역시 집권 초기에는 자국 내 14개의 원자로를 폐쇄하고 원전 의존도를 낮추는 정책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올해 들어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지난 10월 프랑스는 원자력 발전에 연내 10억유로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고, 크로아티아와 체코, 핀란드,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및 슬로베니아 등 EU 회원 9국과 함께 원전을 녹색 분류 체계에 포함해달라고 촉구했다.

이들 국가가 갑자기 친(親)원전으로 돌아선 기폭제는 신종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으로 촉발된 전력난이다. 백신 접종과 함께 경기가 빠르게 회복되는 가운데 역대급 폭염과 한파 같은 이상기후 현상이 겹치면서 에너지 수요가 급증했다. 하지만 탈(脫) 탄소 정책으로 값싼 석탄 발전을 줄여온 터라 늘어난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 결과 유럽 전력 발전량의 23%(2019년 기준)를 차지하는 천연가스 가격이 올해 들어 4배 가까이 급등했고, 석탄 사용량마저 다시 증가했다. 설상가상으로 북해 바람이 2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약해지면서 지난해 유럽 전체 발전량의 13%를 차지했던 풍력 발전 비율이 올해는 5%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원전으로 날씨 변동성과 저장에 취약한 신재생 에너지를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세드릭 오 프랑스 디지털경제부 장관은 “원전은 이념의 문제가 아닌 수학의 문제”라며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선 태양의 높이나 바람의 속도에 의존하지 않는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둘로 나뉜 유럽... “친환경 분류” 전망 우세

그러나 모든 EU 국가들이 원전에 찬성하는 건 아니다. 지난달 초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를 계기로 독일과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덴마크, 오스트리아, 스페인, 아일랜드 등 7국은 원자력을 녹색 분류 체계에 포함하는 것에 반대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친(親)원전파인 프랑스와 반(反)원전파인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이 둘로 쪼개진 것이다. 독일의 스베냐 슐체 환경부 장관 등은 “회원국이 국가 에너지 시스템의 일부로 원자력을 찬성하거나 반대할 주권은 인정하지만, 녹색 분류 체계에 포함하면 친환경 기준에 대한 무결성과 신뢰성 및 유용성이 영구적으로 손상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EU 지도부가 원전 녹색 분류 체계 편입을 강행할 경우 소송전도 불사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래픽 = 박상훈

환경단체들 역시 원전과 가스에 대한 친환경 인증 마크는 ‘재앙적인 실수(disastrous mistake)’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세계자연기금(WWF)과 리클레임 파이낸스 등 150개가 넘는 비영리단체들은 지난 9월 EU 지도부에 보낸 서한을 통해 “원전과 천연가스에 대한 투자는 세계에 재앙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며 반대 목소리를 냈다. 미국의 정치 컨설팅 기업 유라시아그룹의 헤닝 글로이스테인 이사는 미국 경제매체 CNBC와 인터뷰에서 “(원전의) 핵심 문제는 핵폐기물 장기 저장에 대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라며 “현재 나온 모든 (원전) 해결책은 일시적”이라고 했다.

반발과 별개로 EU가 원전을 친환경 투자 대상에 편입시킬 가능성은 크다고 여겨진다. EU 집행위원회의 모든 사항은 각 회원국 추천으로 임명된 27명 집행위원의 다수결로 결정되는데, 원전에 대한 입장을 밝힌 회원국 중 원전 편입을 희망하는 국가가 더 많다. 독일 출신인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조차 지난 10월 열린 유럽이사회 회의에서 에너지 가격 충격을 언급하며 “우리에게 재생에너지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원인 핵(nuclear)과 가스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집행위가 EU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독립기구인 만큼 집행위원들이 출신 국가의 입장과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변수로 남아 있다. 현지 언론에서는 EU가 원전을 ‘과도기적 활동’으로 분류 체계에 포함시키는 절충안을 택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탄소 중립 대안으로 떠오른 소형모듈원전

다른 나라들은 이미 원전을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한 필수 수단으로 보고 투자를 확대 중이다. 특히 소형모듈원자로(SMR)가 탄소 중립과 전력 공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게임 체인저’로 떠올랐다. SMR은 증기발생기와 냉각재 펌프, 가압기 등 주요 기기를 하나의 용기에 일체화한 300MW(메가와트) 이하 소형 원자로를 말한다. 아직 부족한 경제성과 핵폐기물 배출 문제가 남아있지만, 소형화를 통해 안전성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어 차세대 원전으로 꼽힌다. 기존 대형 원전(1000~1만5000MW)과 비교하면 3분의 1에서 6분의 1 수준의 출력을 가진 원전으로, 재해 발생 시 방사능 유출 취약 요소로 꼽히는 배관이 없고, 출력이 낮은 만큼 사고 시 발생하는 붕괴열도 적어 대응이 쉽다. 문제가 발생해도 빨리 식힐 수 있어 방사능 유출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 타임지는 “차세대 원자로(SMR)가 녹색 미래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평가했다. 영국 국립원자력연구소는 전 세계 국가들의 탄소 중립 정책에 따라 2035년 SMR 시장 규모가 최대 4000억파운드(약 627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주요국들의 SMR 개발 경쟁은 이미 뜨겁다. 미국 바이든 정부는 올 1월 차세대 원자로 기술과 SMR 개발에 7년간 32억달러(약 3조6000억원) 투자를 확정했고, SMR 분야 선도 기업으로 꼽히는 미국 뉴스케일은 아이다호 주(州) 국립연구소 내에 발전소 건설을 확정했다. 기후변화 대응 수단으로 향후 15년간 150기 이상의 원자력발전소를 짓기로 한 중국은 ‘제14차 5개년 계획(2021~2025)’에서 해상부유식 SMR를 주요 과제로 선정하고 지난 6월 시험용 원자로 건설 허가를 냈다. 영국 정부는 최근 SMR 16기를 짓기로 한 항공·에너지 기업 롤스로이스에 2억1000만파운드(약 3300억원)를 투자했다. 영국은 세계 최초의 상업용 원자로를 만들었던 ‘원전 종주국’이지만 1990년대 이후 원전 건설을 중단했었다.

소형 원자로 개발 분야에서 선도 기업으로 꼽히는 미국 ‘뉴스케일’의 소형모듈원자로(SMR) 설계도. /뉴스케일 파워

반면 1997년 SMR 개발에 뛰어든 한국은 지난 2012년 SMR ‘스마트’를 개발해 세계 최초로 표준설계인증까지 받았지만 탈(脫)원전 정책 등에 막혀 상용화에 실패했다. 2028년 인허가 획득을 목표로 최근 차세대 소형모듈원전인 ‘iSMR’ 예비타당성 조사에 착수했지만, 투자 규모와 시기, 기술력 면에서 경쟁국에 뒤처진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환익 전경련 기업정책실장은 “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이 40%에 달하는 영국조차 SMR과 원전을 탄소 중립을 위한 핵심 수단으로 인식하고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며 “탄소 중립에 주어진 시간과 일조량, 풍량, 수자원 등 재생에너지 잠재량이 모두 부족한 우리나라 상황에서 SMR과 원전 활용 확대는 필수적”이라고 했다.

☞그린 택소노미(Green Taxonomy)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 활동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어떤 산업 분야가 친환경 산업인지 분류하는 체계. 녹색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산업 여부를 판별하는 정책 기준으로, ‘친환경 투자를 위한 지침서’ 역할을 한다. 유럽연합(EU)이 세계 최초로 지난해 6월 EU판 그린 택소노미를 발표했고, 뒤이어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분류 체계를 준비 중이다. EU는 이달 중 원전을 그린 택소노미에 포함시킬지 여부를 결정해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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