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중앙은행(RBA)은 지난 2일 열린 통화정책회의에서 ‘수익률 곡선 제어(YCC)’ 정책을 전격 철회한다고 밝혀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팬데믹발(發)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2024년 4월까지 유지하기로 했던 정책을 돌연 포기한 것이다. YCC는 중앙은행이 국채 금리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채권을 매수 또는 매도하는 정책이다. RBA는 유동성 공급을 위해 지난해 3월 사상 처음 YCC를 도입한 뒤 국채 3년물 금리 목표치를 0.1%로 설정하고 이를 넘으면 채권을 무제한 사들이는 방식으로 금리를 눌러왔다. 기준금리도 2024년 4월까지 0.1%를 유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이 발목을 잡았다. 3분기 근원물가(변동성이 큰 농산물과 에너지를 제외한 물가) 상승률이 전망치보다 높은 2.1%에 이르자 시장에서 “호주 중앙은행이 내년 상반기 금리를 올릴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채권 투매(投賣) 현상이 나타났다. 국채 3년물 금리가 0.75%까지 치솟아 제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자 RBA는 결국 YCC를 중단하고 “기준금리가 2024년까지 인상되지 않을 것”이라는 문구도 삭제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RBA는 팬데믹 이후 물가 급등에 대응한 최초의 대형 중앙은행 중 하나가 됐다”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위기를 맞아 초(超)저금리와 유동성 공급이라는 공동 대응 전선을 펼쳐온 주요국 중앙은행 사이에 균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중앙은행의 맏형 격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인플레이션은 일시적”이라며 금리 인상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비(非) 기축통화국 중앙은행들은 저금리가 부른 인플레이션과 자산 가격 거품을 견디지 못하고 돈줄 조이기에 나섰다.
◇“인플레이션 못 견뎌”... 기준금리 인상 잇따라
체코 중앙은행은 지난 4일 통화정책회의를 열고 종전 1.5%이던 기준금리를 2.75%로 단번에 1.25%포인트 올려 시장을 놀라게 했다. 전문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1997년 이후 최대 폭의 금리 인상이다. 지리 루스노크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높은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메시지를 주려 했다”며 “다가올 회의에서 추가 금리 인상을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체코 물가 상승률은 6월 2.8%에서 9월 4.9%로 껑충 뛰었다. 난방비 지출이 늘어나는 겨울에는 물가 상승률이 7% 를 넘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중·동부 유럽 중앙은행 중 가장 비둘기적(통화 완화 선호)으로 평가받는 폴란드 중앙은행은 지난달 6일 기준금리를 0.1%에서 0.5%로 올린 데 이어 한 달 만인 지난 4일 기준금리를 1.25%로 또다시 인상했다. 지난 9월 폴란드 소비자 물가는 5.9% 올라 20년래 최고 수준이었다. 폴란드 중앙은행은 내년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종전 2.5~4.1%에서 5.1~6.5%로 상향하며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겠다”고 밝혔다. 리암 피치 캐피털 이코노믹스 연구원은 “(비둘기파인) 폴란드 중앙은행이 모래 속에 처박고 있던 머리를 꺼냈다”며 “투자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인플레이션을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다른 중앙은행들도 속속 금리 인상에 나서고 있다. 지난달 14일 칠레가 1.5%에서 2.75%로, 지난달 27일 브라질이 6.25%에서 7.75%로 기준금리를 인상한 것을 비롯해 10월 이후 루마니아(1.25%→1.5%), 헝가리(1.65%→1.8%), 멕시코(4.5%→4.75%), 뉴질랜드(0.25%→0.5%), 러시아(6.75%→7.5%) 등이 금리 인상 대열에 합류했다. 또 캐나다 중앙은행은 지난달 27일 양적 완화 조기 종료를 전격 발표하며 기준금리 인상 시기를 앞당기겠다고 밝혔고, 노르웨이는 12월에 기준금리를 올리겠다고 미리 알렸다. 지난 8월 주요국 중 가장 먼저 기준금리를 0.5%에서 0.75%로 올린 한국은행은 이달 25일 열리는 금통위에서 또 한 차례 금리를 인상할 것이 유력하다.
◇값싼 돈이 부른 빚 폭탄과 불평등
중앙은행들이 금리 인상을 서두르는 또 다른 이유는 자산 불평등이다. 미국의 투자 컨설팅 기관 야데니 리서치에 따르면, 미국·EU(유럽연합)·일본·중국 등 4국 중앙은행의 총 자산은 올 9월 기준 30조8000억달러(약 3경6544조원)로 코로나 사태 직전인 작년 초 대비 10조달러 넘게 늘어났다. 그만큼 화폐를 많이 찍어냈다는 의미다. 이렇게 불어난 유동성은 실물경제로 향하지 않고 주식과 부동산, 가상화폐 같은 자산 시장으로 흘러들어 버블과 빈부 격차를 유발했다.
세인트루이스 연준에 따르면, 미국의 화폐유통속도는 작년 2분기 역대 최저치(1.1)를 기록한 후 횡보 중이다. 회계법인 딜로이트는 “화폐 유통속도가 낮다는 건 풀려 있는 돈이 실물경제 생산활동에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는 뜻”이라면서 “(같은 시기) 세계 3대 주가지수가 연일 최고치를 돌파했다는 소식은 실물경제 부양을 위해 공급된 유동성이 금융 부문에 집중되고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는 사이 미국의 자산 불평등은 역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 경제매체 CNBC가 연준이 공표한 올해 2분기 말 가계부 자료를 분석한 결과, 미국 가계 보유 주식의 89%가 상위 10% 부자 가구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1989년 통계 작성 이래 최고치다.
한국 사정도 다르지 않다. 정부의 대규모 경기부양책과 함께 한국은행은 지난해 ‘한국판 양적 완화’로 불리는 무제한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제도를 한시 도입하며 시장에 직접 18조6900억원 규모의 돈을 풀었다. 그럼에도 한국의 화폐 유통 속도는 작년 기준 0.63으로 2002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고, 코인과 부동산 가격만 폭등했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30일 발표한 조사통계월보에 실린 보고서를 통해 “지난해 정부 이전지출(실업수당, 재난지원금 등) 확대에도 불구하고 소비불평등도가 2019년보다 상승했다”고 분석했다.
투자은행 도이체방크에 따르면, 선진국 중앙은행이 연설에서 불평등을 언급한 비율은 2018년 5.42%에서 올해 7.96%로 늘었다. 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에서 통화정책을 담당한 찰리 빈 전 부총재는 최근 “양적완화 정책이 불평등을 가중했다”며 “결코 이상적이지 않은 결과를 내는 이 정책을 자주 사용해선 안 된다”며 뒤늦게 후회했다.
값싼 돈이 부른 또 다른 부작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채다. 국제금융협회(IIF)가 지난 9월 추산한 올 2분기 기준 전 세계 정부와 기업, 개인이 진 빚의 총액은 무려 296조달러(약 35경908조원)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올해 예산(555조원)의 632배이고, 전 세계 200여 나라의 작년 국내총생산(GDP)을 모두 합친 것의 4.27배 수준이다. 세계인이 4년 넘게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털어넣어야 겨우 갚을 수 있다는 의미다.
부채 급증은 금융 위기의 도화선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키는 역할도 한다. 특히 팬데믹 기간 늘어난 전 세계 부채의 절반가량을 정부 부채가 차지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화폐가치가 떨어지면 부채의 실질 부담이 감소하기 때문에 빚이 많은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독일의 경제 석학 다니엘 슈테털은 코로나 이후 세계 경제를 다룬 저서 ‘코로노믹스’에서 “각국 중앙정부의 의도적인 저금리 기조 아래 새로운 인플레이션 시대가 펼쳐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딜레마에 빠진 중앙은행들
유동성이 부른 많은 부작용 때문에 각국 중앙은행들이 금리 인상을 서두르고 있지만, 정작 양대(兩大) 중앙은행인 미 연준과 유럽중앙은행(ECB)은 느긋하다. 지난 3일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은 “이번 회의에서 금리 인상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고 못 박았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3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기준금리를 인상하기 전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이 내년에 충족될 가능성은 매우 작다”고 말했다. 단기적으로는 물가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중기적으로는 여전히 인플레이션 압력이 낮아 당장 금리를 인상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영란은행도 시장의 예상을 깨고 지난 4일 통화정책위원회에서 최저 수준인 0.1% 기준금리 유지를 결정했다.
양대 중앙은행이 금리 인상에 머뭇거리는 명시적 이유는 인플레이션이 에너지 가격 상승과 글로벌 공급망 병목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섣불리 돈줄을 조였다가 물가는 못 잡고 경기 회복세에 찬물만 끼얹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깔려 있다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미묘한 시기에 통화정책을 잘못 썼다가 자칫 1970년식 스태그플레이션이 현실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가 전 세계 자산운용책임자를 대상으로 지난달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4%가 “내년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날 것”이라 예상했다. 10년 만에 가장 높은 비율이다. 미국 경제매체 블룸버그는 “글로벌 공급망 위기로 중앙은행이 스태그플레이션에 직면했다”고 했다.
전 세계가 빚더미에 오른 상황에서 뒤늦게 인플레이션을 잡겠다고 금리를 갑자기 인상하면 자칫 또 다른 금융 위기를 낳을 수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CBR)은 지난 2일 발표한 연례 통화정책 전망 보고서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로 “전 세계 공공·민간 부채가 급격히 높아진 상태라 연준이 금리 인상 방아쇠를 당길 경우 세계 경제가 급격히 붕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급격한 금리 인상 시 투자자들이 위험 자산을 투매하고 대외부채가 많은 신흥국이 신용 불안으로 심각한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리스크 프리미엄이 급격히 오르고, 이에 따라 부채 비중이 높은 국가들은 부채를 갚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며 “2023년 1분기에 심각한 금융 위기가 시작될 수 있다”고 했다.
◇통화당국 목줄 조이는 가상 화폐
인플레이션만큼 긴박하지는 않아도, 중앙은행을 괴롭히는 또 다른 골칫거리는 유동성을 자양분 삼아 급속도로 성장 중인 가상 화폐 시장이다. 글로벌 코인 시황 사이트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가상 화폐 시장 전체 시가총액은 지난 4일 기준 2조7600억달러대(약 3274조원)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코로나 직전인 2020년 초 2000억달러대에서 13배 넘게 불어난 것이다. 가상 화폐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중앙은행 권력의 원천인 화폐 발권력은 위협받게 된다. 가령 전 세계 28억명의 이용자를 지닌 세계 최대 소셜미디어 기업 페이스북은 스테이블 코인(달러 가치와 연동된 가상 화폐) 리브라(현 디엠)를 개발한 뒤 지난 2019년부터 직접 화폐를 발행·유통하겠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이 계획은 현재 미국 정부와 연준은 물론 G7(주요 7국)의 반대로 답보 상태이지만, 가상 화폐 시장 일각에선 이미 중앙은행과 정부의 통제를 일절 받지 않는 금융 생태계가 급성장 중이다. 가상 화폐 예치 서비스와 담보대출 등 가상 화폐를 기반으로 한 각종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디파이(DeFi·탈중앙화 분산 금융 서비스)’다.
이더리움 같은 가상 화폐에 내재된 자동 거래 프로그램(스마트 콘트랙트)에 위·변조가 불가능한 블록체인(분산 원장)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디파이는 초기 설정 값만 잘 잡으면 알고리즘에 맞춰 알아서 돌아가기 때문에 가상 화폐 거래소마저 필요 없는 완벽한 탈중앙 금융시장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통제 수단이 전무하다는 뜻이다. 이러다 보니 최근 규제 당국에선 규제 없이 급격히 커지는 디파이가 자칫 새로운 글로벌 금융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며 경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미국 통화감독국(OCC) 마이클 수 집행국장은 지난 9월 블록체인협회 주최 회의에 참석해 “암호 화폐와 디파이가 2008년 금융위기 직전 신용부도스와프(CDS)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런 경고에 아랑곳없이 디파이 시장에 예치된 자금 규모는 지난 6일 기준 1060억5900만 달러(약 125조8390억원)로 팬데믹 직전인 작년 1월 대비 10배 이상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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