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의균

요즘 영국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는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치를 수 있을까’이다. 서구 문화권에서 가장 큰 명절인 만큼 먹을 음식도, 주고받을 선물도 어느 때보다 풍성해야 할 시기지만 올해는 다르다. 운송 대란 탓에 수퍼마켓에 가면 진열대가 텅 비어 있을 때가 잦고, 주유소엔 기름이 없어 군인들이 대신 운반에 나서고 있다.

미국도 상황이 비슷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의 한 트리 판매 업체는 140cm짜리 조명 트리를 지난해 300달러(약 35만원)보다 67% 뛴 499달러(약 58만원)에 예약 판매 중이다. 아직 입고 전이라 예약을 걸어도 실제 물건을 받을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대형 유통업체 코스트코는 휴지와 생수의 인당 구입량을 제한했다. 미국 백악관 관계자는 “크리스마스에 사람들이 원하는 걸 얻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공급 부족 여파는 한국에서도 체감한다. 자동차용 반도체가 부족해 지금 주문하면 새 차를 받기까지 최소 넉 달, 길게는 1년도 넘게 기다려야 한다. 수입 냉동 소갈비 가격이 전년 대비 40%, 노르웨이산 연어 가격이 20% 넘게 오르면서 ‘프로틴(단백질)플레이션’이란 생소한 용어도 등장했다.

지구촌 구석구석이 ‘공급망 붕괴’에 신음하고 있다. 글로벌 PMI(구매관리자지수)의 공급자 배송 시간 지수는 화학, 제지, 광물, 일상용품, 식료품, 자동차, 테크놀로지 장비 등 11개 영역에서 모두 큰 폭으로 떨어졌다. 종합 배송 시간도 23년 만에 가장 느려졌다. 인류가 구축한 역사상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공급망이 어떻게 갑자기 한순간에 엉망이 된 걸까. WEEKLY BIZ가 공급망의 위기를 해부해봤다.

/일러스트=박상훈

◇100일 걸리던 반도체 공급, 지금은 1년 이상

공급망 붕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미국반도체산업협회와 보스턴컨설팅그룹 보고서를 바탕으로 가상의 미국 반도체 제조 회사 A사 공급망을 재구성해봤다. 팹리스(설계만 담당하고 생산은 위탁) 방식으로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반도체를 제조해 모바일 기기 제조사에 납품하는 회사다. AP 반도체는 모바일 기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칩이다. A사의 생산은 이런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①A사는 태블릿PC 제조업체 E사와 납품 계약을 맺고 영국 기업이 가진 지식재산권을 기반으로 반도체를 설계한다. ②A사는 일본의 B사에 반도체 집적회로(IC)의 원판 역할을 하는 웨이퍼 제작을 의뢰한다. B사는 웨이퍼 원료가 되는 메탈실리콘을 중국에서 수입한다. ③B사는 웨이퍼를 제작해 미국의 파운드리(수탁 생산) 업체 C사로 보낸다. C사는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로 AP반도체를 생산한다. ④C사는 생산한 제품을 다시 말레이시아 반도체 위탁 공장 D사로 보낸다. D사는 이곳에서 반도체를 테스트한 뒤 포장(패키징)한다. ⑤D사는 이렇게 생산된 AP반도체 완제품을 E사의 중국 생산 공장으로 보낸다. 이곳에서 태블릿PC를 조립한다. ⑥완제품 태블릿 PC가 세계 각지로 수출, 소비자에게 넘어간다.

이런 공급망의 거의 모든 단계에 최근 차질이 생겼다. 먼저 ②단계에서 원료인 실리콘 가격이 폭등했다. 중국 지방 정부가 전력난을 이유로 메탈실리콘 감산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생산량이 90% 줄어 메탈실리콘 t당 가격은 올해 7월 260만원대에서 이달 초 1100만원대로 3배 이상이 됐다. ③단계에선 반도체 수요 증가로 병목 현상이 생기면서 납품 기간이 한 달 이상 늘었다. C사는 생산 설비를 늘리기로 결정했지만, 양산까지 3년이나 남아 현재는 무용지물이다. ④단계에선 코로나 방역에 따른 봉쇄 조치로 말레이시아 현지 공장 가동률이 40%까지 떨어지며 또 두 달이 밀렸다. ②~⑥단계까지 나라를 옮겨 다니는 데 걸리는 시간과 비용도 크게 늘었다.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가 1년 만에 212% 폭등했는데도 제때 컨테이너선을 구하지 못해 운송이 지연되는 일이 다반사다.

공급망이 정상적으로 가동할 때는 ①에서 ④단계까지 통상 100일 정도 걸렸다. 지금은 4배 가까이 늘어 1년 넘게 걸린다. 비용이 가격에 반영돼 제품 가격도 20% 가까이 뛰었다. 그나마 A사의 AP반도체는 자동차용 반도체에 비하면 공급망이 단순한 편이다. 자동차용 반도체는 말레이시아 반도체 패키징 공장에서 완성차 공장으로 넘어가기까지 최소 두 단계 이상 더 거쳐야 한다.

이런 일이 글로벌 분업으로 생산되는 거의 모든 제품에 유사하게 일어나고 있다. 예컨대 나이키는 올해 2분기 기준 해상 운송 상품의 49%를 베트남 공장 두 곳에 맡겼다가 코로나 때문에 현지 생산이 10주 동안 중단됐다. 미국 증권사 BTIG는 “이 기간 나이키가 신발 8000만켤레를 생산하지 못했으며, 올해 말까지 총 1억6000만켤레 생산 차질이 예상된다”고 했다. 아디다스, 풋로커 등 동남아에서 신발·의류를 생산하는 다른 업체도 비슷한 처지다.

가상 업체 A사의 AP칩 공급망

◇화재·가뭄에 무역 분쟁, 노동력 부족까지

이 밖에도 공급망을 악화시키는 돌발 변수가 쏟아진다. 지난 3월 자동차 반도체 기업 르네사스 일본 공장에 화재가 발생했고, 대만엔 56년 만에 최악의 가뭄이 닥쳐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 TSMC의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빚어졌다.

영국과 미국에선 노동력 부족이 문제다. 영국에서 일하던 외국인 트럭 기사 약 10만명이 코로나 등을 이유로 영국을 떠났다가 브렉시트 여파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미국도 구인난 때문에 트럭 운전기사가 8만명 부족하다. 항만은 하역 노동자 부족으로 선적을 기다리는 컨테이너가 산처럼 쌓였다.

미중 무역 갈등도 공급망 악화에 일조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중국 기업에 물건을 수출하려면 정부의 허가를 기다려야 한다. 미국 정부는 TSMC에 중국에 공장을 늘리지 말라고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국가간 코로나 방역 차이도 공급 병목에 영향을 끼친다. 중국은 ‘제로 코로나(확진자 제로를 목표)’ 전략을 쓰는 반면, 미국 등 선진국은 ‘위드 코로나(일상 회복을 목표로 하는 방역)’ 방침으로 전환하고 있다. 무디스 애널리틱스는 “운송 근로자들이 세계 항구와 물류 허브를 드나드는 규칙이 제각각이어서 네트워크의 원활한 운영이 어렵다”고 했다.

워낙 복잡한 변수가 겹쳐 있다 보니 공급망 위기가 단기간에 해결되리라는 전망은 찾기 어렵다. WSJ이 글로벌 금융 기관 소속 이코노미스트 67명에게 ‘공급망 혼란이 언제 해결될 것으로 예상하는가’라고 물은 결과, 60%가 내년 하반기 이후라고 답했다. 글로벌 회계 법인 딜로이트가 영국 주요 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 92명에게 물은 결과도 비슷했다. ‘공급망 마비가 1년은 이어질 것’이라는 답이 57%였다. 포브스는 “높은 수요가 계속되고 코로나로 폐쇄가 지속되는 가운데 자연 재해까지 곳곳을 강타하고 있어 공급망의 단기적 안정이 요원하다”고 전했다.

자료=월스트리트저널

◇전세 화물선까지 동원...물류 인프라 재편에 안간힘

고민에 빠진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다양한 전략을 짜내고 있다. 월마트, 홈디포, 코스트코, 타깃 같은 미국 대형 유통 업체들은 직접 화물선을 전세 내고 있다. 비용은 아시아-북미 노선 기준 40피트 컨테이너 하나당 1만6750달러(약 2000만원)로, 일반 화물 업체에 맡길 때 운송비의 두 배 정도다. 하지만 일반 화물 업체에 맡기면 아시아 지역에서 물건을 가져오는 데 코로나 사태 전보다 두 배인 80일이 소요된다. 연말 대목인 크리스마스까지 기다릴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전세 화물선을 동원하는 것이다.

온라인 상거래 업체 아마존은 직접 화물용 비행기를 사서 공급망 안정을 꾀하고 있다. 화물선 중심의 물류 허브가 잦은 봉쇄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기존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를 활용해 빠르게 물류 인프라를 재편한 것이다. 현재 화물기 75대를 보유 중인 ‘아마존 에어’는 추가로 보잉777 등 대형 항공기 12대를 중고로 사들여 화물기로 바꿀 계획을 갖고 있다. 지난 3월 소형 화물 항공사 지분을 사들였고, 8월엔 미국 켄터키 북부에 15억달러(약 1조7500억원) 규모 화물 허브도 열었다. 코로나 종식 이후엔 이 인프라를 활용해 국제 항공 택배 사업에 뛰어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투자은행 코웬에 따르면 아마존은 아마존 에어를 출시한 2015년부터 2019년까지 560억달러를 썼는데, 지난해 800억달러를 투자했고 올해도 800억 달러 투입이 예정돼 있다.

산업 전 분야에 부족 사태를 초래한 반도체 문제에 대해선 ‘직거래’나 ‘자체 조달’ 대응이 유행하고 있다. 전기차 업체 테슬라는 협력·하청 업체를 두는 복잡한 단계를 건너뛰고 최상위 단계의 반도체 제조사와 직거래 하면서 올 3분기 판매량을 전년 대비 73% 늘렸다. 테슬라와 반대로 3분기 판매량이 33% 줄어든 미국 GM은 최근 “공급 단계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있으며, 곧 제조업체들과 직접적 관계를 구축할 것”이라고 밝혀 테슬라처럼 변화하리라 예고했다. 현대차 호세 무뇨스 글로벌 최고경영자(COO)는 아예 “반도체 제조 기업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반도체를 직접 개발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모바일 시장에서도 미국 애플에 이어 구글과 중국 오포가 반도체를 자체 개발해 생산만 위탁하기로 했다.

중장기적 해결책으로 ‘니어쇼어링(nearshoring·근거리 국가 생산)’이나 ‘온쇼어링(onshoring·자국 생산)’에 관심을 두는 기업도 늘고 있다. 물류 비용과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고, 제품의 공급 진행 정도를 확인하기도 쉽다는 점 때문이다. 이른바 ‘공급망 가시성’을 높일 수 있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베네통은 2022년 말까지 아시아 생산량을 반으로 줄이고, 나머지를 크로아티아, 터키, 북아프리카에서 생산하기로 했다. 마시모 레논 베네통 CEO는 “배송일이 불확실할 경우 1200~1500달러인 컨테이너 비용이 1만~1만5000달러까지 오를 수 있어 이런 결정을 했다”고 로이터에 말했다. 지중해 지역 생산 비용이 동남아 국가보다 20% 높지만, 대신 리드 타임(주문부터 납품까지 걸리는 기간)이 줄어 약점이 상쇄된다. 독일 패션 브랜드 휴고 보스 역시 동남아 대신 유럽 생산량을 늘릴 계획이다. 이 회사 다니엘 그리더 CEO는 “트렌드를 더 빠르게 적용하고 병목 현상에 유연히 대응할 수 있다”고 했다. 컨설팅사 앨릭스파트너스는 “글로벌 공급망이 복잡할수록 더 많은 일이 잘못될 수 있다”며 “온쇼어링, 니어쇼어링 전환이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급망 혼란을 나타내는 지표들과 글로벌 기업들의 대응

◇탈중국, 온쇼어링, 디지털 공급망 도입 빨라진다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은 없던 문제가 새로 생겼다기보다 잠재해 있던 문제가 한꺼번에 수면 위로 드러난 것에 가깝다. 이미 코로나 이전부터 글로벌 공급망은 온라인 상거래 시스템의 급속한 발달과 미중 무역 갈등 등으로 과부하 조짐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글로벌 회계 법인 언스트앤영은 “코로나 대유행은 이미 존재하는 문제를 가속하고 확대한 것뿐”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공급망의 근본적 약점을 찾아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빨라질 전망이다. 특히 ‘세계의 제조 공장’인 중국 탈출이 가속될 것으로 보인다. 공급망 전문 매체 서플라이체인다이브는 “세계의 공급망 문제는 대부분 중국에서 기인한다”면서 중국에서 상품을 조달(sourcing)하는 데 7가지 리스크가 잠복해 있다고 지적했다. ‘무역 전쟁 및 관세’ ‘지식재산권 절도’ ‘임금 인상’ ‘강제 노동(신장 지역)’ ‘기후(탄소 중립 이슈)’ ‘느려지는 리드 타임’ ‘코로나 발병’ 등이다.

애리조나주립대 데일 로저스 교수는 “위험을 피하려면 근본적으로 공급망 다각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효율성만 따져 한곳에만 공급 기반을 두는 건 이제 ‘모험’에 가까운 일이 됐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많은 업체가 ‘탈중국’을 외치며 대체지를 베트남이나 말레이시아 등 한 국가로 골랐다가 피해를 봤다. 자산 운용사 인베스코의 수석 글로벌 시장 전문가 크리스티나 후퍼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기술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것도 위기에 타격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딜로이트는 “가시성을 끌어올려 각종 사태에 유연하고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로봇 공학, 5G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공급망을 도입하는 게 필수가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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