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시장에는 글로벌 유통업계 두 공룡인 아마존·월마트와 관련한 흥미로운 뉴스가 전해졌다. “아마존이 도심에 백화점을 열고, 월마트가 자율주행 배송을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기업 이름이 뒤바뀐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세계 최대 이커머스(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이 오프라인에서도 가장 전통적 형태로 분류되는 백화점을 운영하고, 대형 할인 마트의 대명사인 월마트가 아마존·구글 등 이른바 ‘빅테크’ 기업이 주도하는 자율주행 배송 경쟁에 뛰어드는 것은, 전 세계 23조달러(약 2경7000조원) 규모의 소매 시장을 놓고 두 회사가 벌이고 있는 건곤일척의 패권 경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미국 매출이 사상 처음으로 아마존에 추월당한 월마트는 ‘더 이상 밀리면 끝장’이라는 절박함이 가득하다. 6월 기준으로 지난 1년간 미국 소비자들은 아마존에서 6100억달러(약 713조원), 월마트에서 5660억달러를 지출했다.
아마존과 월마트가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상대의 영역을 넘본 것은 수년 전부터 꾸준히 이뤄진 일이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이후 상대방의 핵심 사업 영역으로 침투하는 정도가 훨씬 과감해졌다. 작년에는 팬데믹에 따른 경제 봉쇄로 비대면 소비가 급증하면서 리테일 부문의 ‘온라인 시프트(이동)’가 급속도로 빨라졌다가, 올해는 백신 확산으로 크게 움츠러들었던 오프라인 소비가 폭발하는 등 정반대 상황이 펼쳐지면서 각자의 약점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 최양오 고문은 “온·오프라인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신(新)유통 시대에 양 진영 대표 선수 간 격돌이 산업 지형도 전체를 흔들고 있다”며 “일상의 쇼핑 문화와 소비 생활에도 대변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오프라인 공략에 사활 건 아마존
지난 1994년 온라인 서점으로 출발한 아마존은 원클릭 쇼핑, 맞춤형 제품 추천, 제품 평가 및 후기 시스템 등 당시로선 독보적인 온라인 쇼핑 체제를 구축하며 수많은 오프라인 기업과 점포들을 잠식해갔다. 가격 경쟁력과 자본력을 앞세운 아마존 앞에서 온라인 시장의 경쟁자들도 맥없이 무너졌다. 가령 아마존은 2008년 유아용품 전문 쇼핑몰 다이퍼닷컴 등을 운영하는 쿼드시(quidsi)에 인수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 대대적인 할인 공세를 펼쳤다. 결국 쿼드시는 출혈 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2년 후 5억4500만달러에 아마존에 인수됐다.
아마존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제품을 쉽게 찾아 저렴하게 구매하고, 1~2일 혹은 몇 시간 만에 받아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아마존과 경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 경제지 포브스에 따르면 온라인 쇼핑이 대세가 되면서 2017~2020년 사이 미국에서만 1만4000개 가까운 점포가 문을 닫았다. 미국 최대 컴퓨터 유통 체인이던 컴퓨에스에이(CompUSA), 세계 최대 장난감 업체 토이저러스 등 대형 유통업체들도 줄줄이 문을 닫았다. “아마존이 다른 업권을 먹어치운다”는 뜻의 ‘아마존드(Amazoned)’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온라인 시장을 평정한 아마존은 월마트로 상징되는 오프라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2015년 첫 오프라인 소매 점포인 ‘아마존북스’를 연 것을 시작으로 2017년에는 미국 최대 유기농 식료품 체인 ‘홀푸드마켓’을 137억달러(약 16조원)에 인수했다. 이는 아마존 역사상 최대 규모의 M&A(인수합병)였다. 2018년 계산대 없는 편의점 ‘아마존고’를 오픈한 데 이어 올해는 백화점 개장 계획까지 발표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내년 캘리포니아와 오하이오주(州)에 문을 여는 ‘아마존 백화점’은 고객이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으면서 옷을 고르고, 로봇이 배치되는 등 첨단 IT가 적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마존이 오프라인 공략에 나서는 이유는 오프라인 리테일 시장이 여전히 탐나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리테일 시장에서 온라인 비율이 크게 늘긴 했으나, 지난해 전 세계 온라인 판매액은 4조달러(약 4730조원)로 오프라인 전체 판매액(18조5000억달러)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이사회 의장은 지난 2018년 “물리적 매장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전자상거래가 모든 것의 일부가 되겠지만 전부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했다. 도심에 있는 오프라인 매장의 지리적 이점 덕분에 식료품 배송 및 당일 배송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점, 온라인 주문 상품의 편리한 반품 등 온·오프라인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쇼핑 경험을 원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는 점 등도 아마존이 오프라인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WACD로 반격 나선 월마트
아마존이 영역을 침범해 오자 오프라인의 터줏대감인 월마트는 전의(戰意)를 불태우며 반격에 나섰다. 지난 2017년 아마존이 홀푸드마켓을 인수하며 사실상 월마트와의 전면전을 선포하자, 월마트 이사회 그레그 페너 의장은 “우리는 강한 적수를 만났을 때 최고의 실력을 발휘한다”며 결의를 다졌다. 이듬해 월마트는 회사 설립 48년 만에 사명을 ‘월마트 스토어’에서 ‘스토어(점포)’를 뺀 ‘월마트’로 바꾸며 “디지털 회사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미국에만 5000여 매장을 거느린 월마트의 반격 전략은 ‘오프라인 인해(人海)전술’이다. 미국 인구의 90%는 월마트 매장으로부터 10마일(약 16㎞) 이내에 산다. 이런 촘촘한 점포망마다 딸린 넓은 매장과 주차장을 온라인 주문 픽업(클릭 앤드 컬렉트)용 키오스크로 활용하는 것이다. 고객이 온라인으로 주문한 물품을 직원들이 고객 차에 실어주는 ‘커브사이드 픽업’, 온라인 구매품을 2시간 내 배송해주는 ‘익스프레스 딜리버리’ 서비스도 도입했다. 오프라인에 기반한 온라인 전략이 성공을 거두며, 지난해 월마트의 전자상거래 매출은 분기별로 70~90% 증가했다. 지난해 아마존의 전자상거래 매출 증가율이 17.2%에 그친 것과 대조적이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NBK리테일’의 내털리 버그는 “아마존이 ‘리테일 파괴자’로 군림하면서 유통업계에선 ‘아마존이 하지 못하는 일(What Amazon Can’t Do)’을 해야 한다는 ‘WACD’란 말이 나왔는데 월마트가 이 전략을 제대로 구사했다”고 했다.
월마트는 ‘아마존이 잘하는 영역’에도 수시로 잽을 날리며 아마존을 긴장시키고 있다. 제트닷컴, 플립카트 등 전자상거래 업체를 과감히 인수한 것, 아마존의 멤버십 서비스 ‘아마존 프라임’의 대항마인 ‘월마트 플러스’를 작년에 출시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월마트는 배송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자율주행·드론·로봇 등의 IT 확보에도 나서고 있고, 공중에 떠다니는 물류 창고, 자율주행 스마트 카트 등의 특허도 확보한 상태다.
◇'리테일 통합 챔피언’ 경쟁력은 아마존 우위
아마존과 월마트가 벌이는 ‘리테일 대전’의 최종 승자는 누가 될까. 온라인 서비스와 오프라인 체험, 첨단 물류를 융합한 형태의 ‘신(新)유통’ 체제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는 쪽이 승기를 잡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월마트가 ‘리테일 통합 챔피언’ 벨트를 계속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우선 온라인 쇼핑 경쟁력에서 아마존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미 월마트(7.1%)의 5배가 넘는 점유율(40.4%)을 확보하고 있는 데다 직매입 상품과 ‘오픈마켓’을 통틀어 3억5000만 종류에 달하는 제품군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월마트는 온라인 제품군의 종류가 아직 수천만 개 수준에 불과하다. 여기에 아마존 온라인 쇼핑을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전 세계 2억명 넘는 유료 회원이 있고, 이들의 구매 행태가 빅데이터로 축적되면서 맞춤형 쇼핑 서비스는 갈수록 고도화되고 있다. 결제·상거래 시스템 전문 매체 페이먼트닷컴은 “아마존의 온라인 쇼핑 경쟁력을 앞지르는 것은 어느 기업이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또한 아마존은 첨단 물류·배송 기술 확보에 매년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지난 2017년 아마존은 미국 S&P500 지수 편입 기업 중 가장 많은 226억달러를 R&D(연구개발)에 투자했다. 월마트가 올 초 대대적인 IT 투자 계획을 밝히며 제시한 금액이 140억달러였다. 이런 대규모 투자 덕분에 아마존은 전체 배송 비용의 30~40%를 차지하는 ‘라스트 마일’ 부문에서 비용을 낮출 수 있는 가장 앞선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미 2016년 세계 최초로 드론을 이용한 무인 배송에 성공했고, 지난해 9월에는 미국 연방항공청으로부터 배송용 드론에 대한 운항 허가도 받았다.
여기에 작년 말 기준 북미에 611곳의 매장을 보유하고 있을 만큼 오프라인 확장 속도도 빠르다. 최근에는 온라인에서 거의 유일하게 월마트에 뒤지던 식료품 부문마저 점유율을 30%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월마트의 아성을 넘보고 있다. 미 경제 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따르면 월마트는 아마존의 온라인 식료품 성장세에 충격을 받고 1위 수성을 위한 비밀 프로젝트 조직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소매 판매의 80%가 여전히 오프라인 점포에서 나오는 점, 월마트가 구글·페이스북 등의 초대형 플랫폼 기업이나 기술 스타트업들과 협력해 연합 전선을 구축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아마존에 대한 규제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월마트가 ‘리테일 1위’ 자리를 호락호락 내줄 리 없다는 반론도 있다. 이베스트투자증권 오린아 연구원은 “결국 신유통 시대에는 소비자를 플랫폼 생태계로 유입시키고, 지속적으로 붙잡아 이를 통한 거래 규모 증대를 이끌어내는 기업이 패권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에 ‘옴니채널’ 경쟁… 한국은 규제에 가로막혀
온·오프라인 리테일의 경계를 허무는 ‘옴니채널(omni-channel)’ 경쟁은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전 세계 전자상거래 매출의 52%를 차지하는 중국이 대표적이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는 작년 10월 ‘중국판 월마트’인 ‘선아트리테일’ 지분 72%를 인수해 자회사로 편입했고, 신선 식품 매장 ‘허마셴성(盒馬鮮生)’도 중국 전역 240여 곳에서 운영 중이다. 허마 매장은 3㎞ 반경 내 고객에게 ‘30분 배송’을 해준다. 중국 2위 전자상거래 업체 징둥닷컴 역시 ‘세븐프레시’라는 신선 식품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대형 마트들이 월마트와 비슷한 전략으로 이커머스 업체에 맞서고 있다. 이마트와 롯데마트는 도심 주요 매장들을 ‘총알 배송’을 위한 미니 물류 허브로 만들고 있다. 매장 천장에 레일을 설치하고, 온라인 주문 상품을 담은 장바구니들을 배치해 매장 인근에 사는 고객들에게 빠른 배송이 이뤄질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반면 아마존이나 알리바바처럼 적극적으로 옴니채널 전략을 구사하는 이커머스 기업은 한국엔 아직 없다. ‘한국의 아마존’을 표방하는 쿠팡조차 상장과 투자 유치 등으로 확보한 자금을 주로 물류센터 및 배송 인프라 확장에 쏟아붓고 있다. 김연학 서강대 초빙교수(기술경영대학원)는 “아마존은 미국 내 이커머스 점유율이 40%에 달하지만, 아직 쿠팡은 점유율이 네이버(17.4%)보다 낮은 13.6%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추가적인 가격 인하와 배송 시간 단축 등을 통해 이커머스 시장 내 경쟁력을 키우는 게 우선일 것”이라고 했다. 온라인 플랫폼에 대한 중복 규제도 혁신적인 서비스 출시나 사업 확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쿠팡은 현재 ‘대규모 유통업법’에 따른 출점 및 영업시간 제한 규제를 받고 있는데, 공정거래위원회와 방송통신위원회도 각각 ‘온라인 플랫폼법’ ‘온라인 플랫폼 이용자 보호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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