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빌보드 차트를 석권한 데 이어 지난달 미국 최고 권위의 음악 시상식 ‘그래미 어워드’에서 단독 공연 무대를 가진 방탄소년단(BTS). 지난해 10월 신종 코로나 사태 와중에 BTS가 개최한 온라인 콘서트엔 전 세계 191국 100만명의 유료 관객이 모였다. /빅히트뮤직

방탄소년단(BTS)의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석권,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 등 네 부문 수상, 영화 ‘미나리’의 골든글로브 수상과 아카데미 6개 부문 후보 지명. 지난 1년여 새 한국 대중문화의 성취다. 2억명이 이용하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넷플릭스에선 한국 SF영화 ‘승리호’가 글로벌 인기 순위 1위를 차지하고, ‘킹덤’과 ‘스위트홈’, ‘사랑의 불시착’ 등 한국 드라마들이 시청률 상위권을 휩쓸기도 했다.

지난 2일엔 BTS의 소속사 하이브(HYBE)가 세계적 팝스타 저스틴 비버와 아리아나 그란데를 거느린 미국 이타카 홀딩스를 10억5000만달러(약 1조1850억원)에 전격 인수하는 일도 벌어졌다. 세계 대중문화 산업의 본고장인 미국의 유명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한국 기업에 인수된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위상이 높아졌다며 “K컬처(한국 문화) 산업이 세계 시장의 주류로 진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의 대중문화 산업은 이제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당당히 선도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일까. Mint가 K컬처 산업이 새롭게 조명받는 이유와 그 성공 비결, 전망을 살펴봤다.

◇글로벌 엔터 산업의 ‘혁신 엔진’

세계 시장에서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약진은 수치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현재 K팝과 한국 영화·드라마를 즐기는 소비자(팬)는 2억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지난해 집계한 세계 98국의 한류(韓流) 온라인 동호회 회원만 1억478만명에 달한다. 2015년의 3560만명에서 5년 만에 3배가 된 것이다. K콘텐츠 산업의 해외 시장 규모(수출액 기준)도 2015년 57억달러(약 6조4000억원)에서 2019년 100억달러(약 11조원)로 4년 만에 약 2배가 됐다. K팝 음반은 글로벌 음반 시장의 불황 속에서도 홀로 선전 중이다. IFPI(국제음반산업협회)는 “2013~2019년 글로벌 음반 시장 규모가 연 평균 5.7%씩 감소했지만 K팝 음반의 판매량은 연평균 28%씩 성장했다”고 밝혔다.

한국 대중문화 산업에 대한 평가도 수직 상승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Forbes)는 “(K팝이) 서구의 음악 팬들이 비(非)서구권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꿨다”고 했고, 영국 월간지 모노클(Monocle)은 “한국 음악과 영화, 드라마가 한국의 강력한 소프트파워가 됐다”고 했다. K컬처 산업의 규모만 봐서는 나올 수 없는 평가다. 한국 콘텐츠 산업 규모는 598억달러(2018년 기준)로 글로벌 시장(2조3000억달러)의 2.6%에 불과하다. 미국 연예매체 더할리우드리포터는 “한국은 세계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새로운 힘”이라고, 모노클은 “한국이 엔터테인먼트 혁신에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하이브의 이타카 홀딩스 인수는 한 단계 더 올라선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글로벌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이번 거래 과정에 관여했던 M&A(인수·합병) 전문가는 “이타카를 이끄는 세계적 프로듀서 스쿠터 브라운이 한국식 디지털 수익 모델과 탤런트(인재) 육성 시스템, 드라마와 영화, 게임으로 이어지는 연계 사업 모델까지 폭넓은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K컬처 산업의 경쟁력이 새로운 ‘혁신 모델’로 주목받으면서 미국의 콧대 높은 엔터테인먼트 기업마저 한 수 접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K팝과 한국 드라마·영화의 세계적 성공을 바탕으로 한국 대중문화의 위상도 크게 높아졌다. BTS의 소속사 하이브(HYBE)가 세계 최고 팝스타로 꼽히는 저스틴 비버(①)와 아리아나 그란데(②)를 거느린 미국 미디어 기업 이타카 홀딩스를 인수하고, 소니뮤직이 JYP와 손잡고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된 K팝 스타일의 여성 아이돌 그룹 니쥬(NiziU·④)를 데뷔시켜 ‘국민 아이돌’로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BTS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여성 아이돌 그룹 블랙핑크(③)는 멤버마다 3000만~5000만명의 소셜미디어 팔로어(follower)를 거느리며 전 세계 여성의 패션과 뷰티 트렌드를 이끄는 ‘수퍼 인플루언서’로 등극했다. 한국 대중문화는 전 세계인이 즐기는 하나의 문화 장르로 인정받는다. 지난 201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K팝 콘서트에 몰려든 유럽 K팝 팬들(⑤).

◇철저한 디지털 비즈니스 모델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주목하는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혁신적 경쟁력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우선 철저히 디지털화한 비즈니스 모델을 꼽는다. K팝과 드라마·영화 모두 기획 단계부터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홍보와 소비자(팬덤) 확대가 우선된다. 수익화 역시 인터넷 산업의 다양한 공짜 비즈니스 모델을 충실히 따른다. 4K급 초고화질 뮤직비디오도 음반 발매와 함께 인터넷상에 완전 무료로 공개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조회수 1회당 수익은 1~5원에 불과하지만, 1억회의 시청이 쌓이면 약 4억원의 수익을 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종의 ‘초(超)박리다매’ 전략이다. 이런 식으로 싸이의 ‘강남 스타일’(40억뷰) 뮤직비디오는 지금까지 약 160억원, 블랙핑크의 ‘뚜두뚜두’(15억뷰)는 약 60억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TV 방영이나 영화관 개봉에 비해 1회 시청당 수익이 턱없이 낮은 넷플릭스와 웨이브, 티빙 등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에 적극 나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K팝의 디지털 비즈니스 모델은 팬을 위한 상품(굿즈)을 파는 인터넷 쇼핑몰, 실시간 스트리밍을 이용한 온라인 콘서트, 팬들을 위한 커뮤니티 플랫폼(서비스) 등으로 확장됐다. 95%는 공짜로 제공하면서 5%의 충성 고객으로부터 수익을 올리는 디지털 경제의 ‘프리미엄(freemium)’ 전략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의 디지털 콘텐츠 시장 규모는 미국·중국·일본·영국에 이은 세계 다섯째 규모로 성장했다. 미국 연예 매체 버라이어티는 “철저히 디지털과 결합한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경쟁력을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참고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실리콘밸리’라는 말까지 듣는 이유다.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또 다른 혁신 경쟁력은 ‘글로벌리즘(Globalism·세계화 추구)’이다. 인적 자원부터 그렇다. K팝의 경우 2010년대 이후 외국인 아티스트의 영입이 일반화됐다. EXO와 2PM, 슈퍼주니어, 트와이스, 블랙핑크 등 주요 아이돌 그룹이 대표적이다. 스타뿐만이 아니다. SM엔터테인먼트는 1998년부터 해외 작곡가를 영입, 최근에는 400여 명 이상의 해외 작곡가를 관리하면서 매달 수백 곡의 샘플곡을 받고 있다. YG엔터테인먼트의 핵심 프로듀서 테디는 미국 교포 출신이다. 비즈니스 모델도 항상 글로벌을 염두에 둔다. CJ ENM의 이선영 CP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흥행할 수 있는 코드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등, 사전 기획 단계부터 해외 판권 판매를 목표로 철저히 준비한다”고 했다.

이는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정체성이자, 해외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는 핵심 경쟁력이 됐다. 특히 일본과 중국 등 해외시장에서 현지 소비자의 이질감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한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것을 소개하면서, 사람들이 이미 익숙한 것들을 끌어들이는 전략”이라고 평한다. 글로벌 트렌드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힙합과 R&B, EDM(전자 댄스 음악), 댄스 팝 등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여러 장르가 결합해 전 세계 누구에게나 어필할 수 있는 음악이 된다. 임진모 대중음악 평론가는 “K팝에는 미국과 유럽, 일본 팝(Pop)의 요소들이 모두 들어가 세계인이 호응할 수 있는 ‘유니버샐러티(universality·보편성)’가 구축됐다”고 말했다.

◇극단적 효율성의 제작 문화

한국 드라마·영화의 특징은 강렬한 영상미와 변화무쌍한 스토리 전개에서 오는 긴장감이다. K팝도 마찬가지로 멜로디의 고조가 분명하고, 한 곡 안에서 스타일(장르)과 리듬이 변화를 거듭한다. 뮤직비디오는 한 1초도 정적인 장면이 없을 만큼 역동적이다. 영상 제작사 ‘돌고래유괴단’의 신우석 대표는 “한국 콘텐츠는 조미료를 잔뜩 넣은 음식처럼 자극적”이라며 “상식을 한참 벗어난 ‘막장 드라마’나 사이코, 초능력, 북한과 같은 독특한 소재를 활용해 스토리를 전개하는 방식도 중독성 있다”고 했다.

대중의 관심을 즉각 사로잡을 수 있는 콘텐츠를 저비용·고효율로 제작하는 방식이 뿌리내리며 형성된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독특한 스타일이다. 1990년대 이후 작은 한국 시장을 놓고 대형 방송사와 케이블 채널 등이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인 영향이다. K팝의 제작 시스템도 다르지 않다. 아이돌 그룹의 경우 2000년대 초부터 SM과 DSP, JYP, YG 등 대형 기획사 간 경쟁이 고조되면서 외모와 노래뿐 아니라 완벽한 군무까지 요구하는 높은 잣대가 자리 잡았고, 4~5년간 인재 육성(트레이닝) 과정이 일반화했다. 연예 기획사는 체계적 A&R(아티스트 발굴·육성) 조직을 통한 트레이닝 시스템의 ‘공정화’도 실천했다. 연습생들은 고난도의 트레이닝 속에서 지속적인 경쟁을 통해 극소수만 데뷔하는 ‘초(超) 경쟁 시스템’에 길들여진다.

한국 대중문화 산업은 이로 인해 ‘엔터테인먼트의 포디즘(Fordism)’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극단적 효율화를 추구하는 표준화된 시스템을 통해 ‘팔릴 만한’ 콘텐츠와 스타를 양산해 낸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강력한 경쟁력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일본 소니뮤직이 JYP와 손잡고 만든 니쥬(NiziU)라는 여성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 2019년 일본 순회 오디션으로 뽑은 연습생을 한국에서 훈련시켜 한국에서 제작한 노래로 지난해 10월 데뷔, 29일 만에 일본 최고 인기 가수만 나오는 NHK의 연말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까지 나가며 일본의 국민 아이돌로 등극했다.

◇'K’를 버려야 살아 남는다

최근에는 컴퓨터그래픽(CG) 기술력이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새로운 경쟁력으로 부각된다. K팝 뮤직비디오와 영화 승리호 등의 초현실적 세계를 그리는 데 한국의 CG 기술이 두각을 보이면서다. 최근엔 애니메이션 제작사 대원미디어가 만든 ‘용갑합체 아머드 사우루스(Armored Saurus)’란 TV 시리즈가 국내외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공룡과 로봇이 서로 합체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고품질 CG가 핵심이다. 미국 CG 업체와 비교해 제작 기간은 절반, 비용은 10분의 1이라는 압도적으로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 한국 CG가 K컬처 전반의 혁신 경쟁력 요소가 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K컬처 산업이 여러 혁신 경쟁력을 바탕으로 세계 대중문화 산업의 벤치마크 대상까지 됐지만,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적 ‘주류’가 됐다고 보기는 아직 성급하다는 분석이 많다. 이문원 대중문화 칼럼니스트는 “지금은 잊힌 일본 영화와 스웨덴 팝이 각각 1950~1960년대, 1970년대에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고 했다. 한 나라의 특정 문화 상품이 세계적 이목을 끌면 그 나라의 문화 예술 전체가 상당 기간 ‘글로벌 트렌드’가 되는 것이 상례(常例)란 것이다.

미국과 유럽 시장을 뚫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K팝과 한국 드라마·영화를 이민자와 소외된 청소년의 문화로 폄하하는 분위기도 여전하다. 전문가들은 K컬처가 글로벌 대중문화 산업의 주류로 자리 잡으려면 이른바 ‘K’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 대중문화의 성공은 산업적 경쟁력이 높아서이지, ‘한국적’이어서 성공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신우석 대표는 “자꾸 ‘한국적’이라는 부분만 강조해 흥행만 했다 하면 ‘K’를 갖다 붙이지만 이는 외국인에게 반감만 사고,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안 된다”며 “반도체, 자동차, 조선처럼 우리나라가 잘하는 산업 중 하나로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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