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경기 파주에 있는 선일금고 제작 본사에서 김영숙(65) 대표가 보여준 소형 금고 전면에는 철제 손잡이나 비밀번호 다이얼이 없었다. 대신 유명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가 그려져 있었다. 선일금고 제품에는 유독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금고 전면에서 철제 손잡이를 없애고 평면으로 만든 것도, 문 전면에 있던 비밀번호를 금고 상단으로 옮긴 것도 금고 업계 최초다. 지금은 스마트 기술을 도입해 금고 주변을 동영상으로 모니터링하는 금고까지 내놓고 있다. 이 회사가 보유한 금고 관련 특허만 20건에 달한다. 김 대표는 “꾸준한 혁신을 통해 차별화되는 제품을 내놓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테리어 입히고, 스마트 기술 도입하고… 금고의 끝없는 진화
1973년 설립된 선일금고는 김 대표가 두 딸과 함께 ‘세 모녀 경영’을 통해 키워낸 국내 1위 금고 업체다. 47년째 금고에만 매진하면서 투박하기만 했던 금고에 인테리어를 입히고, 스마트 기술을 도입하는 등 세계 시장에서도 독보적인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고문서나 기밀 문건을 보관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정부 청사, 육군·해병대 사령부 등에서도 이 회사 제품을 쓴다. 영화 ‘도둑들’부터 시작해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펜트하우스’까지 히트작 영화나 드라마 작품에 나오는 금고도 다 이 회사 제품이다. 숙련된 기술공 150명을 비롯한 직원 250명이 연 매출 400억원을 올리는 알짜 기업이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이 업체를 올해의 ‘명문장수기업’으로 선정했다.
김 대표는 2004년 남편이자 창업자인 고(故) 김용호 전 대표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경영 전면에 나섰다. 각각 공학과 경영을 전공한 두 딸도 경영 일선에서 엄마를 지원하고 나섰다. 김 대표는 “처음엔 여자들이 잘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많았지만, 세 모녀가 ‘여자들이 하면 다르다는 걸 보여주자’며 의기투합했다”고 말했다.
세 모녀의 첫 기획은 칙칙한 이미지의 금고 디자인부터 바꾸는 일이었다. 매출 30%가량을 제품 개발에 투입해 ‘여성적 감성’을 입힌 세련된 제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2008년부터는 금고에 클림트나 반 고흐 등 유명 화가 예술 작품을 넣어 만든 디자인 금고 브랜드 ‘루셀’을 출시했다. 거실 한복판에 금고를 둬도 어색하지 않은 인테리어 금고가 탄생했다. “금고가 튼튼하기만 하면 되지”라는 편견을 깬 이 제품이 선일금고의 대표 상품이 됐다.
금고에 스마트 기술도 도입했다. 지문 인식은 기본이고, 금고 기울기가 바뀌거나 미세한 충격만 감지돼도 바로 센서가 알려준다. 암호를 5번 잘못 누르면 자동으로 경찰이 출동하는 서비스도 내놨다. 가장 최근엔 아예 금고 주변 상황을 2000만 화소 카메라로 24시간 녹화해 특이 사항이 생기면 금고 주인의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전송하는 기술까지 적용했다.
◇금고도 김치냉장고처럼… ‘1가구 1금고 시대’ 꿈꾼다
김 대표의 경영 철학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의 금고 산업은 사양 산업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열정과 노력을 다하면서 얼마든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김 대표의 목표는 모든 가정이 금고를 하나의 ‘보안 가전’으로 들이는 ‘1가구 1금고’ 시대를 열어가는 것이다. 김치냉장고나 스타일러처럼 금고를 필수 가전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남편은 생전에 입버릇처럼 대대손손 회사를 이어가자고 말했다”며 “우리나라에는 100년 넘는 기업이 잘 없는데, 3대, 4대까지 이어가 유럽처럼 전통 있는 기업으로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