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년 전 과학계는 “물의 본질은 하나”라는 학파와 “두 종류 액체”라는 학파가 치열하게 대립했다. 김경환 포스텍(포항공대) 화학과 김경환 교수는 당시를 회고하며 “물의 본질에 관한 가설을 처음 제안한 분들조차 저희 실험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극저온에서 물을 직접 관측해 답을 내겠다는 김 교수의 연구 계획에 학계 반응이 차가웠단 얘기다. 물이 기존 측정 장비로 관측하기도 전에 너무 빠르게 얼어붙어 실험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당시 정설이었다.

10년을 파고든 김 교수와 앤더스 닐슨 스웨덴 스톡홀름대 교수 공동 연구팀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져온 가설 입증에 성공했다. 물의 본질 논쟁에 “두 종류 액체로 존재한다”는 해답을 세계 최초로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최근 발표한 것이다. 김 교수는 “성공 가능성이 극도로 낮은 연구여서 도전하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해낼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김경환 포스텍 교수가 지난 24일 정부세종청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브리핑실에서 영하 약 60도가 물의 두 종류 상태 경계가 사라지는 ‘임계점’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10조분의 1초 단위로 분자 추적

물은 우리 주변에 가장 흔하고 익숙한 물질이지만, 동시에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물질이다. 일반적인 액체는 온도가 낮아질수록 밀도가 증가한다. 하지만 물은 섭씨 4도에서 가장 무겁고 온도가 더 내려가면 오히려 가벼워진다. 얼음이 물 위에 뜨고, 겨울에도 강물 표면만 얼고 아래는 액체로 남는 이유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1992년 ‘액체-액체 임계점’ 가설이 나왔다. 물이 고밀도 상태와 저밀도 상태 두 가지 액체로 존재하다가 특정 온도에서 그 경계가 사라진다는 이론이다. 문제는 검증이었다. 임계점은 영하 40도 이하 극저온에 존재할 것으로 추정됐지만, 보통 물은 그 전에 얼어버린다. 특히 영하 42도를 기준으로 온도가 더 낮아지면 어는 속도가 급격히 빨라진다. 과학자들은 이 구간을 사람이 검증하기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무인지대(No man’s land)’라고 불렀다. 이론 논쟁만 이어져 온 이유다.

돌파구는 포항가속기연구소의 X선 자유전자레이저(PAL-XFEL)였다. 2017년 연구자들에게 개방된 이 장비는 태양보다 수십억 배 밝은 X선을 이용해 10조분의 1초 단위로 분자의 움직임을 추적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이 장비를 이용하면 얼기 직전 찰나의 물 상태를 포착할 수 있겠다고 판단해 실험에 돌입했다”고 밝혔다. 이 장비를 가동해 실행한 1호 연구였다.

김경환 포스텍 교수 연구팀이 두 종류의 상태로 존재하던 물이 임계 온도를 넘어서면 하나의 상태로 변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미지. /포스텍

◇사이언스 3건...“교과서에 남을 성과”

극저온 상태에서 얼지 않은 상태의 물을 만들어내는 것도 넘어야 할 과제였다. 녹는 점이 극도로 낮은 특수 얼음을 만들고 적외선 레이저로 가열해 영하 70도에서도 액체 상태를 유지하는 ‘과냉각수’를 만들어야 했다. 이 물은 약 100만분의 1초 만에 다시 얼어붙고 생성할 수 있는 양도 극미량에 불과했다. 연구팀은 2017년 영하 45도, 2020년에는 영하 70도까지 관측 범위를 넓히며 물이 두 가지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해 냈다. 두 논문 모두 사이언스에 발표됐다.

연구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영하 50~70도 구간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데 도전했다. 6년여 연구를 더 진행한 끝에, 영하 약 60도 부근에서 두 액체 상태의 경계가 사라지는 ‘임계점’을 확인한 것이 이번 연구 성과다. 김 교수는 “임계점 자체를 확인해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며 “온도와 압력을 조금씩 바꿔가며 같은 실험을 반복해 임계점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왼쪽은 임계점 온도보다 높아 한종류 상태인 물을, 오른쪽은 임계점 이하에서 두 종류로 나뉜 상태 물을 표현한 모식도다. /포스텍

이번 연구는 물의 특이한 성질이 두 액체 상태 간 경쟁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처음 입증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물은 기후 변화, 생명 현상, 화학 반응 등 거의 모든 자연과학의 기반이 되는 물질이다. 물의 상태를 더 정확히 이해하면 단백질 구조, 구름 형성, 화학 반응 모델링 등 다양한 연구에 적용할 수 있다. 산업적으로도 활용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제1저자인 유선주 포항공대 화학과 석·박사 통합과정생은 “교과서에 남을 자연법칙을 발견하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는데 실제로 그런 결과를 내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