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부산 기장군에 있는 한국수력원자력 고리원자력본부. 여의도 면적 3배가 넘는 98만평 부지에 원전 6기가 모여 있는 이곳은 출입부터 보안이 삼엄했다. 신분증 확인, 사진 촬영, 지문 인식을 거쳐 방문증을 발급받고, 스마트폰엔 촬영을 금지하는 보안 앱을 설치해야 했다. 해안가엔 철조망이 얹혀진 장벽이 둘러져 있었고, 거대한 구조물 곳곳에 영화 속 핵무기에서 보던 방사선 경고 표지가 붙어 있어, 마치 군사기지에 들어온 듯했다. 이곳에서 원자력안전위원회는 기자단과 함께 고리원전 1·2호기 현장 점검을 진행했다.
1978년 4월 운전을 시작한 국내 상업 원전 1호인 고리 1호기 내부는 1970년대에 멈춰 선 느낌이었다. 천장엔 투박한 글씨체로 ‘안전운전 약속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벗겨진 칠 자국과 낡은 설비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2007년 한 차례 운영이 연장된 고리 1호기는 2017년 6월 영구정지됐고, 이후 9년째 멈춰 서 있다. 곳곳엔 ‘고리1호기 영구정지관련 미사용 설비’라는 문구가 마치 압류 딱지처럼 붙어 있었다. 하지만 현장엔 “윙윙” 거리는 기계음과 간헐적으로 울리는 “삐이 삐이”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재가동을 준비 중인 고리 2호기에서 넘어온 소리였다. 같은 건물 두꺼운 격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선 수명을 다한 원전이 본격 철거 작업을 앞두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선 멈췄던 원전이 다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리 1호기 해체와 2호기 계속 운전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그동안 건설 중심이던 K원전 사업이 건설-운영-해체로 이어지는 ‘전 주기 산업’으로 확장하는 분기점에 놓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 원전 맏형 고리 1호기 역사 속으로
고리 1호기는 지난해 6월 최종 해체 계획을 승인받았다. 다음 달부터 본격적인 구조물 철거 작업을 앞두고 있다. 40년 동안 전기를 생산해 온 발전기, 터빈 3개, 펌프 68개, 탱크류 75대, 2200t 분량 배관 등 각종 구조물이 해체 대상이다. 비방사성 계통 구조물을 먼저 걷어내고, 사용 후 핵연료를 실어 내 습식 저장소로 옮긴 다음, 나머지 방사선 오염 설비를 철거하는 순서다. 최종적으로 부지 복원까지 마쳐야 하는데 2037년이 목표다. 사업 기간만 12년, 총사업비는 1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대형 프로젝트다.
고리 1호기의 본격적인 해체는 원전 사업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국내에서만 원전 30기를 모두 해체한다고 가정하면 시장 규모가 20조원대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수원은 이번 사업을 계기로 원전 해체 기술을 확보해 해외 시장에도 진출하겠다는 계획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2050년까지 전 세계에서 최대 588기 원전이 영구 정지되는데, 시장 규모는 500조원을 넘는다. 우리나라 원전 해체 기술은 약 90% 정도 국산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다. 김윤석 한수원 고리원자력본부 1호기해체사업실장은 “이번 기회에 국산 원전 해체 기술력을 확보해 건설·운영·해체로 이어지는 전주기 산업 역량을 갖추고, 세계 원전 해체 시장 5위권에 진입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고리 2호기 빠르면 이달 말 재가동
바로 옆 고리 2호기는 재가동을 앞두고 사고관리계획서에 따른 후속 조치 이행 여부가 주요 점검 대상이었다. 사고관리계획서는 2016년 원전 사고 대응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다. 극한 재해 상황이나 여러 고장 사고가 동시에 발생하는 상황을 가정해 위기 대응을 강화하는 취지다. 고리 2호기는 이 계획을 실제 적용해 가동하는 첫 사례다.
현장엔 발전소 냉각 기능이 멈췄을 때 물을 주입할 이동형 펌프차와 비상 전원을 공급할 이동형 발전차가 배치돼 있었다. 냉각재를 외부에서 주입할 수 있게 한 주입구, 각종 케이블 등 노후설비 226개 품목도 교체를 마쳤다. 해빙기에 지반이 약해지는 데 대비한 배후 사면 보강 공사 현장도 둘러봤다.
고리 2호기는 650메가와트급 원전으로 지난 40년간 부산 시민 전체가 9년 넘게 사용할 수 있는 규모의 전력을 생산했다. 하지만 2023년 4월 운영 허가가 만료되면서 개점휴업 상태다. 운영 허가 만료를 앞두고도 연장 운영을 위한 신청이 늦어졌고, 심사 진행 와중에 운영 허가가 만료되면서 가동을 멈춰 선 것이다. 이 때문에 10년간 운전을 연장했어도 실제 가동은 7년가량밖에 운영하지 못하게 됐다. 계속 운전 기산점을 규제 당국 승인일이 아닌 운영 허가 만료일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 전쟁이 벌어지면서 고리 2호기 재가동 필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한수원 최동철 고리원자력본부 1발전소장은 “25일까지 최종 준비를 마무리하고, (원자로 재가동 주요 절차인) 임계 전 회의 일정에 따라 빠르면 이달 말이나 4월 초 재가동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최원호 원자력안전위원장은 “요즘 중동 상황으로 여러 가지 신경 쓸 일이 많지만, 임계까지 가는 과정에서 안전 검사와 시험은 서두르지 말고 철저히 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