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새도약기금 출범식/뉴스1

정부가 역대 최대 규모의 개인 빚 탕감 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대출 연체자들을 중심으로 ‘빚 안 갚고 버티면 된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어 금융회사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정부는 배드뱅크(부실 자산을 인수해 정리하는 전문 기관)인 ‘새도약기금’을 통해 개인 113만명의 7년 이상, 5000만원 이하 빚 총 16조4000억원을 내년부터 순차적으로 탕감할 계획이다. 또 소상공인·자영업자의 채무 조정을 위한 기존 ‘새출발기금’ 사업을 확대해 10만 소상공인 등의 채무 6조2000억원을 조정할 예정이다. 이런 규모는 김대중 정부의 농가 부채 탕감(17조5500억원)을 넘는 역대 개인 대상 빚 탕감 정책 가운데 최대 규모다.

◇금융사 “연체 고객 전화 연결 안 돼”

올 들어 금융회사들은 대출 연체율 상승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경기 부진 때문이라는 이유가 크지만, 빚을 안 갚아도 된다는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다는 게 우려스러운 점이다.

카드론 등을 취급하는 카드사의 경우 대출 연체율이 2023년 말, 2024년 말에는 2.4%로 변화가 없었지만, 올해 8월 말 3.3%로 치솟았다. 그런데 최근 고객에게 연체 사실을 통보하는 금융사 콜센터 직원들은 “정부의 채무 조정·탕감 정책 시행이 눈앞에 다가오자 연체 고객들이 전화를 잘 받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A 카드사의 경우, 30일 이상 연체 고객과의 통화 성공률이 지난 1월 48.6%에서 7월 27.5%로 추락했다. 20여 년 경력의 한 금융사 연체 채권 회수 담당자는 “최근 들어 고객에게 연체 사실을 안내하면 ‘정부의 개인 회생·탕감 프로그램을 이용할 테니 전화하지 말라’며 끊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전했다.

금융회사들은 연체된 대출 채권을 조기에 매각해 장부상 부실을 털어내는 식으로 대응하지만, 이로 인해 장기 수익이 하락할까 봐 걱정되는 상황이라고 한다. 23일 국회 정무위원회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이 금융감독원을 통해 19개 은행·저축은행·카드사·캐피털사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이 회사들의 연체 채권 매각액은 2조9419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2조2775억원)보다 29.2% 늘었다. 한 금융사 임원은 “연체 채권이라도 제값을 받지 못하면 장기 수익이 악화돼 성실 상환 고객 등에게 부담이 전가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법률 사무소 “도박 빚도 탕감” 홍보

최근 인터넷에는 “채무 조정과 탕감을 받을 기회”라는 변호사와 법무사 등의 광고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한 개인회생 변호사는 지난달 유튜브에 ‘코인, 과소비도 조건부 없이 개인회생 개시’라는 제목으로 상담을 안내하는 콘텐츠를 올렸다. 다른 변호사는 지난 8월 인스타그램을 통해 ‘불법 도박 빚 3억2000만원 탕감받고 인생 리셋(reset·초기화)’이라며 상담 전화번호를 게재했다. 본지가 한 인터넷 채무 상담 카페에 게재된 법무법인 연락처로 전화하자, 변호사는 “이번처럼 정부가 채무를 대폭 탕감해 주는 기회는 드물다”면서 “조금만 추심 압박을 버티면 원금을 탕감받을 수 있는데, 그걸 무서워하면 계속 빚 갚으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채무 전문 변호사도 상담 통화에서 “빚을 갚지 않고 더 버텨서 부실 차주가 되는 게 깔끔할 수 있다”면서 “하락한 신용 점수는 다시 재기하면 끌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추경호 의원은 “대규모 채무 조정·탕감 프로그램이 불러올 도덕적 해이와 성실 고객 및 금융회사에 미칠 경제적 효과를 분석해 제도적 미비점이 있다면 보완해서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