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진짜 사장이 나서라”는 하청·비정규직 노조의 집회가 곳곳에서 열린다. 지난 24일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마자 기업에 대한 노동계의 압박이 거세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날 현대제철 협력사 비정규직 노조 등은 서울 서초구 대검 앞에서 원청인 현대제철을 불법 파견 등으로 고소한다. 금속노조는 25일 “현대제철이 노란봉투법 통과 이후 ‘원하청 교섭 1호 사업장’이 되도록 적극 취재해 달라”는 보도 자료를 돌렸다. 같은 날 경기 성남시 네이버 사옥 앞에선 네이버 7개 자회사 노조가 네이버를 향해 직접 교섭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집회를 연다. 발전소 비정규직 노조는 용산 대통령실 인근에서 ‘고용 안정’을 내건 총파업 대회를 연다.
노란봉투법 시행은 6개월 뒤부터지만, 제철·발전 같은 제조 현장부터 IT 업종까지 산업 전 분야에서 원청 대기업을 향해 ‘직접 교섭하라’는 하청 노조 목소리가 벌써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미처 법 개정에 준비할 틈도 없이 노조의 전방위적 청구서가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제철, 직고용하라” “방산 파업 허용하라”… 업종마다 아우성
25일 한 재계 관계자는 “현대제철 협력사 노조가 민주노총과 함께 원청인 현대제철을 고소하는 것 자체가 기업에 대한 공세가 시작될 거란 신호탄”이라고 했다. 이를 시작으로 조선·자동차·석유화학·물류 등 원·하청 구조가 확산해 있는 국내 주요 산업 분야에서 협력사와 하청 노조의 유사한 요구와 압박이 잇따라 불거질 것이라는 우려다. 특히 노란봉투법에 담긴 교섭 확대 자체도 부담이지만, 주 4.5일 근무제, 정년 연장 등을 포함해 노동계의 오랜 현안들이 이참에 무더기 청구서로 쏟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노란봉투법 통과를 계기로 정부·여당의 친(親)노동 기조를 확인한 노동계는 거칠 것이 없다는 분위기다. 재계에선 26일 민주노총이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 국가 안보와 관련된 방산 물자를 생산하는 사업장에서 파업 등 쟁의 행위를 금지한 법에 대한 위헌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여는 것이 대표적이라고 본다. 주요 방위 산업 물자를 생산하거나 연구하는 사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는 안보 차원에서 파업 등을 할 수 없도록 돼 있지만, 이를 깨겠다는 것이다.
◇현대차 파업권 획득
노란봉투법 국회 통과 이튿날인 25일 현대차 노조는 조합원 4만2000여 명 대상 투표에서 86% 찬성으로 파업권을 획득했다. 현대차 노조는 올해 임단협에서 정년 연장(60세→64세), 주 4.5일 근무제 등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앞세워 사측을 압박하고 있다. 작년 12월 소급 적용을 제한한 대법원의 통상임금 판결과 무관하게 ‘위로금’ 명목으로 1인당 2000만원 지급도 요구하고 있다. 현대차 노조가 파업을 한 건 2018년이 마지막이지만 노란봉투법이 통과된 올해는 무분규를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 현대차 안팎에서 나온다.
자동차 업계는 미국의 관세 폭탄으로 지난 2분기(4~6월)부터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노란봉투법이 통과돼 올해 임금 및 단체 협상이 더 난항을 빚을 전망이다. 현대차 등 국내 완성차 업계는 당장 생산 라인을 시장 상황에 맞게 조정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다. 이달엔 전기차 아이오닉 5와 코나 일렉트릭을 생산하는 현대차 울산 1공장 2라인에서 노사 갈등이 현실화됐다. 현대차가 전기차 판매 부진 속에 올해 해당 라인의 여섯 번째 휴업을 지난 13일 결정하자, 곧바로 노조가 휴업을 거부하고 조합원 전원에게 출근 지침을 내린 것이다.
한국 GM(GM한국사업장) 노조도 25일부터 인천 부평공장에서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노조는 지난 5월 말부터 사측이 추진하는 전국 직영 서비스센터와 부평공장 일부 시설의 매각을 철회하지 않으면 임단협 협상에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줄파업에 구조 조정 골든타임 놓치나
업계 전반에 장기 불황이 닥친 철강·석유화학·건설은 악재가 더해졌다. 중국 등 경쟁국에 치여 한계에 봉착한 이 업종들은 생산 라인 중단, 사업장 통폐합, 감원, 전배(배치 전환) 등 고강도 구조 조정이 불가피하다. 직고용 인력뿐 아니라 하청(협력사)의 반발도 거셀 수밖에 없다. 회사의 사업 재편 결정도 노란봉투법을 근거로 파업 대상이 되면 이런 조치는 사실상 ‘올 스톱’, 골든타임을 놓치는 최악의 상황도 우려된다.
당장 석유화학 업계는 올 연말까지 주력 제품인 에틸렌 생산량을 최대 25% 감축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데, 이미 구조 조정 가능성이 큰 사업장에선 하청 노조가 ‘포괄적 고용 승계’를 요구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한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연말까지 25% 감축은 사실 전례 없는 속도전”이라며 “생산 라인을 세우고 직원들을 전배할 때마다 파업이 벌어지면 사실상 불가능한 대책”이라고 했다. 현대제철도 조 단위 투자를 통해 미국에 제철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미 이를 두고 노조와 갈등을 빚고 있다.
특히 석유화학·철강은 대규모 사업 재편 과정에서 정부의 세제 혜택과 보조금이 절실한데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마찬가지로 침체를 겪고 있는 건설업도 현 정부에서 엄벌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는 ‘중대 재해’ 속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재계 관계자는 “노란봉투법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노동계에 앞으로 정부·여당이 계속 힘을 실어줄 것이란 메시지도 담겼다는 게 기업으로선 더 부담”이라며 “노조에 계속 경영의 주도권을 조금씩 내주는 상황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