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경남의 A사 공장. 완성 부품을 옮기는 두 직원이 서로 말없이 데면데면했다. 같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지만 한 명은 A공장 직원, 나머지 한 명은 근처 B공장 직원이다. A공장 직원이 B공장에 가서 일할 때도 있다. 일명 ‘여풀떼기(옆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 작업’이다. 여풀떼기는 가까운 공장끼리 더 일하고 싶어하는 직원을 서로 빌려주는 것으로, A회사 정직원이 B회사에선 파트타임(시간제)으로 일하는 식이다.
이 일대 공장에 여풀떼기가 등장한 것은 작년 하반기 무렵이다. 올해 ’50인 이상 300인 미만' 사업장에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이 예고되자, 해당 공장들은 기준에 맞추기 위해 직원 빌려주기를 해오고 있다. ‘한 사업장에서만 주 52시간을 지키면 된다’는 점을 이용한 편법이다. 직원을 더 뽑으려 해도 주 52시간제로 30% 정도 줄어들 임금으론 ‘일 좀 한다’는 숙련공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회사 대표는 “옆 회사 직원이 아무래도 기존 직원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져 납기일을 못 맞출 때가 허다하다”며 “안전사고가 나지 않을까 항상 조마조마하다”고 말했다.
‘저녁이 있는 삶’을 모토로 2018년 7월 도입된 ‘주 52시간제’가 올 1월부터 직원 50인 이상 300인 미만 중소기업 2만7000곳에도 시행됐다. 여기에 7월부터는 5인 이상 50인 미만의 영세 중소기업도 적용된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구인난에 시달리는 생산 현장에서는 ‘숙련공 이탈’이나 ‘생산성 하락’ 등 심각한 부작용을 겪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외국인 대체 근로자 확보도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은 “주 52시간제가 중소기업 성장의 싹을 자르고 있다”며 “중소기업이 무너지면 주력 제조업의 경쟁력도 유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울산·거제 일대엔 요즘 ‘다단계 협력사’라 불리는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대기업에서 계약을 따낸 중소기업이 일감을 여러 하청업체에 나눠주는 식이다. 이전에도 중소기업끼리 하도급·재하도급을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지금의 ‘다단계 협력사’는 원래 같은 회사를 쪼개 억지로 재하도급을 준다. 30인 미만 사업장은 노사 합의 아래 2022년까지 주(週) 8시간 추가 연장근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를 30인 미만 규모의 여러 개로 쪼개고 형식상 하도급에 재하도급을 주는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한 조선 협력업체 대표는 “예전엔 일부가 세무조사를 피하기 위해 다단계 협력사를 만들었는데, 요즘엔 주 52시간 규제를 피하기 위해 회사를 쪼개는 곳이 엄청 늘었다”고 말했다. 직원 200명을 15개로 쪼갠 곳도 있다고 한다. 직원 200여 명인 경북의 한 금속열처리업체도 회사 쪼개기를 고민 중이다. 주 52시간제로 임금이 줄면 안 된다며 직원들이 먼저 요구했다고 한다. 이 기업 대표는 “회사 쪼개고, 또 사업자 등록을 하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지만 임금 손실을 우려해 ‘더 일하게 해달라’는 직원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직원 빌려주기’ ‘회사 쪼개기’가 생존을 위한 임시방편일 뿐 장기적으로는 노사(勞使) 모두에 독(毒)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공장을 옮겨다니는 직원들의 집중도 하락으로 생산성 악화와 안전사고의 위험은 커지고, 직원들의 근로 조건도 오히려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근로자가 사망할 경우 대표와 대주주를 형사처벌하는 중대재해법이 내년 시행되면 안전사고가 났을 경우 기업 경영에 치명타를 입힐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강원도의 한 석회석 가공업체는 50인 미만으로 쪼갰던 회사를 최근 다시 합쳤다. 이 회사 대표는 “회사를 쪼개니 직원 관리가 잘 안 돼 안전 문제가 심심찮게 발생했다”면서 “주 52시간 시행에 중대재해법 도입까지 가뜩이나 코로나로 죽을 맛인데 해도 너무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