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학병원 전경. /조선일보DB

급속한 초고령 사회 진입으로 중증 돌봄, 임종 준비 등 존엄한 생애 말기를 보내려는 수요는 늘어나고 있지만 관련 시설의 공급이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한국은행의 보고서가 나왔다. 10일 장시령 한은 경제연구원 미시제도연구실 과장 등은 보고서 ‘초고령 사회와 생애 말기 필수 산업의 산업화’에서 노인 요양 시설과 화장(火葬) 시설의 확충을 위해 공공의 관리 체계는 유지하되 민간 참여를 확대하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연구팀은 분석 내용을 이날 오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연세대학교 ‘인구와 인재 연구원’과의 공동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다.

한은은 사망 전 1~2년 정도 중증 돌봄과 임종 준비가 필요한 인구가 2001년 14만8000명에서 지난해 29만2000명으로 늘었고 2050년엔 63만9000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관련 시설과 서비스 공급은 빠르게 늘어나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연구진이 국가데이터처·보건복지부 등의 자료로 추산한 결과 노인 요양 시설의 경우 2008년 이후 중증 돌봄이 필요한 ‘생애말기 고령인구’와 ‘일상생활 제약 고령인구’가 각각 연평균 3.6%, 4.2%씩 늘어난 데 비해 요양 시설 입소 인원은 연평균 8.0%로 약 두 배 빠르게 증가했다. 특히 생애 말기를 편히 마무리하려는 수요가 올라가며 인기가 많아진, 평가 등급이 높은(국민건강보험공단 평가 A·B등급) 시설은 전체의 38%에 그쳐 1년 이상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은은 “평가 상위 시설은 대기가 길어지는 반면 하위 시설은 정원 미달을 겪는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연주

사망 후 화장 비율이 2000년 33.5%에서 2024년 94.0%로 올라가면서 인구가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화장 시설 부족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다. 특히 수도권 시설이 상대적으로 적어 2024년 기준 화장 시설 가동 여력(실제 화장 건수에서 적정 가동 건수를 뺀 수치)은 서울의 경우 사망자 대비 마이너스(-) 11.7%로 과부하인 반면 전라북도 지역은 116.2%로 가동 여력이 남아도는 상황이다. 한은 연구진은 “이 같은 수급 불균형은 생애 말기 삶의 질과 존엄한 마무리를 위협하고, 사회 전체의 손실과 부담으로 이어진다”고 전했다.

한은은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공공 재정의 지원과 함께 민간의 참여를 늘리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예를 들어 노인 요양 시설의 경우 지역별 부동산 비용 격차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일당 정액 수가제’가 시설의 대도시 신규 진입을 막는 요인으로 지목되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 서비스는 공적으로 보장하되 토지·건물 사용분에 대한 귀속 임대료는 비급여 항목으로 분리해 이용자가 부담하도록 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한은은 제안했다.

‘일당 정액수가제’는 요양 시설에 입소한 어르신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식사·간호·요양 등)에 대해 하루 단위로 미리 정해진 금액을 건강보험 급여로 지급하는 제도다. 이 수가는 지역과 무관하게 책정되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높은 인기 지역의 경우 건물 등을 임대해 버는 수익이 요양 병원 운영으로 건보를 통해 받는 돈보다 많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이유로 요양 병원이 선호도가 높은 지역에 세워지지 않는 문제가 있으므로, 부동산 비용 차이를 비급여로 받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 한은의 의견이다.

한은은 아울러 대도시 화장 시설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병원 장례식장 내 소규모 화장 시설 도입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연구진은 “화장 시설은 지역 주민 기피 문제가 있어 인구가 많을수록 반발이 심해 시설은 부족해지는 문제가 있다. 병원 장례식장 내 화장 시설을 도입할 경우 임종·장례·화장을 한 공간에서 마무리해 유족 편의를 높이고 시설 분포의 불균형, 지역 갈등 등의 문제도 해소할 수 있을 전망”이라고 전했다.

현행법상 민간 화장 시설 자체가 막히진 않았지만, ‘의료법’에 장례식장만 의료 법인의 부대 사업으로 허용하고 있어 병원 내 화장 시설 설치는 불가능하다. 아울러 대학 병원의 경우 ‘교육환경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화장 시설을 만들 수가 없다. 한은은 “현대 화장 기술은 친환경 설비와 관리 시스템을 통해 환경적 우려를 충분히 해소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한 만큼 대도시 내 시설 설치를 가로막는 규제는 정비되어야 한다”며 “다만 병원 장례식장 내 소규모 화장 시설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환경·안전 기준과 투명한 절차 확립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해 12월 서울 중구 한은에서 열린 국민건강보험공단과의 공동 심포지엄 ‘초고령사회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생애 말기 의료를 중심으로’에 참석해 축사를 하는 모습. 한은은 3년 전부터 초고령화 사회 및 생애 말기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잇달아 내왔다. /뉴스1

한은은 지난 3년간 ‘고령층 계속 근로 방안’, ‘주택연금 활성화’, ‘돌봄 인력 확충’, ‘연명의료 결정 제도 개선 방안’ 등 고령화 및 생애 말기와 관련한 연구 보고서를 잇달아 발표해 왔다. 연세대 ‘인구와 인재 연구원’과는 지난해 3월 초고령 사회 대응을 위한 연구 협력 강화를 목표로 MOU(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이날 심포지엄 축사에서 “고령화는 분명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구조적 변화이기도 하다”며 “돌봄·의료·장례 등 생애 말기 필수 서비스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는 만큼, 제한된 공공 재정만으로는 뒷받침에 한계가 있어 산업적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공급 기반을 함께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